독후글

유득공의 '발해고' 서문

푸른나귀 2020. 1. 2. 10:06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 삼국사(三國史)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마땅히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들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김씨가 망하고 댔가 망한 뒤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했는데, 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족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족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 때에 고려를 위하여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급히 발해사를 써서,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 고 여진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토문강 북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고구려 땅이다."고 거란족을 꾸짖은 뒤에 장수 한 명을 보내서 그 당을 거두어 오게 했다면, 압록강 서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누가 " 발해는 요나라에 멸망 되었으니 고려가 무슨 수로 그 역사를 하겠는가?" 고 말 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발해는 중국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史官)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 만 명이나 되니,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사관이 없고 역사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자에게 물어 보았다면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은계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 『발해국기』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어찌 홀로 발해 역사를 지을 수 없다는 말인가?

 아, 문헌이 흩어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얻을 수가 없구나. 내가 내각의 관료로 있으면서 궁중 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하여 군,신,지리,의장, 물산,국어,국서, 속국의 9고(考)를 만들었다. 이를 세가(世家), 전(傳), 지(志)로 삼지 않고 고라 부른 것은,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진년(1784) 윤 3월 25일


* 장건장 ; 장건장(장건장, 806~866)의 묘지명이 1956년 북경에서 발견되어 그의 일생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832년에 발해 사신이 유주(幽州,현재의 북경)를 방문하자, 그는 833년에 사신으로 발해에 가게 되었다. 834년 9월에 발해 수도에 도착 하였고, 835년 8월에 유주에 돌아왔는데, 그 뒤에 『발해기』3권을 지었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데, 『신당서』「발해전」에 많은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고,유득공 지음, 송기호 옮김, 홍익출판사,2013, 40~42쪽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