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렸을적에...

新 청고을 이야기(5)...

푸른나귀 2008. 10. 3. 15:31

 

 

다섯째글; 토정 이지함 선생...

 

               두해전 벽초 홍명희선생의 대하소설 임꺽정을 읽다가 토정 이지함 선생을 만났다.

               임꺽정이가 제 스승을 만나려 제주도에 가다가 누추한 옷차림에 철로된 삿갓을 쓰고

               남해안을 지나던 토정선생을 만나는 대목이 있었는데, 그때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읽어 내렸었다.

               당대의 대학자이며, 현감벼슬을 하신분이 여행길에 대죽장을 짚고, 삿갓도 아닌 무거운

               철삿갓을 쓰고 다니시며 그것으로 목마를때 물떠먹고, 배곱을땐  밥을지어 먹으며,

               세수할때 세숫대야로 사용하였으니 후에 일어난 성호 이익선생의 실학사상의 발원지

               였을것으로 생각하여 기억에 남겨두기는 하였어도 임꺽정의 소설에 흠뻑 빠져

               있었기에 그책을 읽는것으로 지나쳐 버렸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은 조선 중기 1517년에 청고을 장산리의 외갓집에서 태어나서 1578년 

               에 지병이 있어 지네를 달여먹고 생밤을 먹어야하나 독을 다스리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세상에 학자이면서도 기인(奇人)으로 불릴정도로 역학,의학,천문,지리에 능통하셨으니

               청고을의 출신의 대학자이신 선생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존경심을 갖고 글을 엮어 보기

               로 한다.

 

       하나; 토정선생의 생애

                토정 이지함선생은 본관이 한산이며 호는 수산,토정이다.

                고려말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어머니가 김성우장군의 고손녀이고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에게서 글공부를 하다가 송도의 서경덕 선생의 문하생이된다.

                화담 서경덕 선생은 송도3절(박연폭포,황진이,서경덕)로 이르킬정도로 속세를 벗어

                던진 역학,의학,천문,지리에 해박하신 유불선의 대학자이시기에 토정선생은 그의

                영향을 크게 받으셨다.

                1573년 포천현감으로 제수되기전 마포에서 흙으로된 정자를 짓고 기거 하였다해서

                土亭이라는 호를 얻었으며, 포천현감으로 지낼적엔 백성규휼을 힘써 재물을 불릴수

                있는 염전개발과 농지개발등 획기적인 일들을 상소를 통해 이루려 했으나 받아들여

                지지않차 사심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전국 방방곡곡 순례를 한다.

                3년후 또다시 아산현감에 제위되어 고을에 가니 백성들이 굶주리고 거지들이 들끓으매

                현청앞에 걸인청을 만들어 백성들을 규휼하시었다.

                가난한 백성들에게 일하는것을 가르치며 먹고 살수있도록 민생을 살피며, 자립할수

                있도록 애쓰셨다.

                지금도 년초에 대중들이 즐겨찿는 "토정비결"이 선생의 작품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설왕설래하지만 분명한것은 선생이 그당시까지만 하여도 역학에선 선생을 넘볼수

                있었던 위인이 없었기에 더욱 값어치가 있는것이다.

 

        두리; 토정선생의 인물론

                황진이가 화담 서경덕선생을 사모하여 어찌하든 한번 정을 통하고져 하룻밤을 같이

                하였는데 화담은 절세가인을 범하지 않았기에 황진이가 평생 화담선생을 존경하였

                다고 한다. 물론 황진이의 시험속에 토정선생도 포함이 되었었다고 한다.

                화담의 수제자로써 조선의 가장 중심에선 유교, 그리고 불교,또한 선을 중시하는

                도교의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백성을 위한 위민정신이 배어나고, 수많은 여행으로

                풍수및 역학에도 뛰어나 미래를 예측하는 도인의 반열에 오른것이다.

                중앙의 권력과 동화되지 않고, 각지에 숨어 제자들을 가르치는 대학자들을 즐겨찿음

                으로써 학문의 경지를 높이면서 담론 하시기를 좋아해 제주도도 스스로 배를몰고

                세번씩이나 다녀오셨다 한다.

 

        서이: 토정선생의 사상

               16세기 조선은 사림에 몇번의 사화로 인하여 현실정치에 싫증이난 유림들이 향리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육성하거나 서로의 학문을 교류하면서 다음세대를 기약했다.

               선생은 화담선생으로부터 학문을 전수받고, 율곡 이이,박순 ,정철등과 교류를 하고

               특히 진주에 은거중이던 남명 조식(1501~1572)을 수없이 찿아감으로써 남명과는 학풍과

               사상을 함께하였다.

               토정선생은 또한 풍채가 호걸형이라 무예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한산지역의 의병장 조헌, 보령의 이산겸에게 영향을 끼쳐 보령지역 왜군을 무찌른데도 

               큰 힘이 되어 주셨다.

               선생은 16세기 주자성리학에서 좀더 다른 사상을 흡수하시어 17세기 일어난 실학사상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니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다. 

 

       너이; 맺음말

               우리는 토정 이지함선생 하면 토정비결을 지은사람 정도로만 알고있다.

               한 오백년전 청고을에서 태어나 풍운의 꿈을 품고 마포의 토담집에서 어렵게 공부를

               하시며 중앙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시다 더큰 꿈을 펼쳐보이려 했지만, 세상이 이를

               알아주지 않으매 전국을 돌며 후학들을 키우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펴려는 위민사상이

               돋보여진다.

               토정비결은 그 힘든 삶에 지친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세지가 되어 주었고, 실용주의적인

               선생의 삶은 그 백성들에게 존경의 찬사를 받았을것이다.

               선생이 태어나신 그 땅에서 우리도 태어났슴을 대단한 긍지로 생각하고,

               고향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자!!!...

               선생의 유택은 보령시 주교면 보령화력 가는 길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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