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 190편 ; 남포읍성의 명문석

푸른나귀 2025. 10. 28. 19:09

 남포읍성은 세종 27년(1445년)에 축조되었는데, 60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면서 형태가 많이 훼손되기도 하였지만, 그 당시의 모습을 유추해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조선 시대의 성벽을 쌓는 역사는 대부분 그 지역 사람들이 군역을 대신하여 동원되거나 규모가 좀 크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동원이 되어 농한기를 이용한 2~3개월 동안의 교대로 축조하기도 하고, 각 절에 있는 스님들을 동원하여 승군을 편성하고 성 쌓는 일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곳 남포읍성을 쌓을 때도 충청지역 영동 사람들이 동원되어 쌓았다는 흔적이 동북쪽 성벽의 돌에 '영동(永同)’이라 각자가 된 초석이 있는데 이는 요즈음 '공사 실명제'에 해당하는 조선 시대의 공사 실명제로 축조 후 붕괴하는 부실공사를 방지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도 보인다.

 

 이 명문석은 남포읍성 동문지에서 동쪽 성벽을 따라 100여m 동남쪽 치성에 가까운 곳이며, 치성의 모서리에서 보면 동문지를 향해 21m 지점에 위치 한다.

최근에 성벽 보수공사가 이루어져 원래의 성벽 모습이 아니어서 약간의 변형이 있을 것이라고 보이지만, 현재의 상태를 되도록 상세하게 기록하여 보았다.

 

 이곳 성벽의 높이는 기단부터 6단으로 2.1m이며 주변의 성벽 높이보다 낮게 설치되어 있다. 명문석은 지표면에서 4단에 위치하는데 약 1.1m 높이에 위치한다. 4단의 명문이 새겨진 돌의 크기는 너비 60cm, 높이 45cm로 거칠게 다듬어진 사각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돌의 두께는 가늠하기 힘드나 개략 40cm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축조는 외부를 석축으로 약 10cm 정도씩 들여 쌓으며 6단을 쌓았고, 내부는 흙으로 경사면을 두어 성벽의 안정화를 기하였다. 상부는 약 3.5m 정도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명문석이 있는 성벽의 돌은 하부 초석의 크기가 70*25cm, 2단은 90*30cm, 3단은 45*30cm이며 그 위 4단에 명문석이 위치하고, 5단은 50*20cm, 최상층 6단은 40*30cm로 상부층으로 올라가면서 작은 돌을 배치하여 성벽의 안정화를 꾀하였다.

 

 해서(楷書)체의 세로로 석각한 ‘영동(永同)’은 글자 크기가 가로 9cm, 세로 20cm이며 깊이는 3~5mm 정도로 명문석의 약간 우측으로 치우쳐 새겨져 있다. 혹시 좌측의 빈 여백에 축성 연월일이나 축성자를 대표하는 이름이 있지 않은지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불가능하였다.

지금의 영동은 신라 시대에 길동(吉同)으로 불렸다는데, 이두문에서 ‘길’은 ‘永(길 영)’이기에 경덕왕 시기부터 영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영동(永同)은 확실하게 충청도의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 명문석이 말해주는 역사적 가치는 첫째, 글씨체나 한자를 통해 시대구분을 할 수 있으며, 축성 시기와 주체를 파악할 수 있다. 둘째로 행정체계 복원 시 명문에 새겨진 고을 名, 군영 名으로 당시 행정체계 추정할 수 있다. 세 번째로 그 당시 지역 간 협력 구조를 파악할 수 있으며, 여러 지역 공동 축성의 증거이기도 하다. 네 번째로 보령지역 역사연구의 핵심 자료로 조선 중후기 충청도 서남 해안 방어체계를 파악할 수 있다.

 

   @ 동남쪽 치에 가까운 명문석 위치 성벽

@ 영동( 永同 )이란 지명이 석각된 명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