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남계서원은 최치원 역사공원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10km 떨어진 수동면 원평리 586-1에 위치하며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등록된 9곳의 서원 중 한 곳으로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서원은 16~17세기 조선 시대 지방 교육의 요람으로 성리학적 가치관을 확립하고, 문묘 종사의 제향을 봉행함으로써 학파의 결집을 도모하였던 사립형태의 교육기관이었다.
이곳의 건축양식은 남서향으로 남강(남계, 蘫溪)과 들판을 바라보며 나직한 언덕 위로 정문인 풍영루를 거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배치하고, 한 단 높은 곳에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명성당이 자리하며, 그 뒤 경사지에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全學後廟)의 전형적인 한국서원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제향 공간인 사당은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맞배지붕의 건물로 내벽 정면에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셨고, 서쪽에는 동계 정온 선생을, 동쪽에는 개암 강익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강학 공간인 명성당의 현판은 1566년(명종 21)에 남계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 소수서원 이래 두 번째로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현판이 두 쪽으로 나누어져 걸려있다. 이는 명성당의 정면이 4칸이라서 현판의 중앙배치를 위한 방안이었다고 한다.
정여창 선생이 자신의 호를 일두(一蠹)로 한 것은 ‘한 마리의 좀 벌레’라고 자신을 비하하는 듯한 낮은 자세의 마음가짐일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지만, 실제 선생의 뜻은 ‘선비가 선비 역할을 다 하지 못하면 한 마리의 좀 벌레에 불과하다.’라는 신념으로 자신에게 경각심을 갖고자 하여 붙였다고 한다. 좀 벌레란 남의 것을 아무 노력 없이 뜯어먹는 자를 말한다. 훈구파에게 밀려 향리에 내려온 사림파들은 난세를 피하고 제자들을 키우면서 기회를 잡으려 했던 조선 중기의 학자들이다. 피비린내 나는 정치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환경이 성현들을 탄생시킨 아이러니를 이곳에서도 엿보고 가는 것 같다.
2. 참고자료
@ 위치 ;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
@ 지정 ;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
* 함양 남계서원(사적 제499호)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이자 선현들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남계서원은 조선 초기 성리학자이며 동방 5현으로 불리는 일두 정여창 (一蠹 鄭汝昌)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기 위해 1552년 개암 강익(介菴 姜翼)을 비롯한 지방 유생들이 건립하였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원으로 1566년에 명종임금에게서 하사받은 사액 서원이다. 출입문인 풍영루와 강당, 동재, 서재, 경판고,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급한 경사지에 사당을 제일 높은 곳에 두고 출입문까지 일직선상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전학후묘의 배치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며, 이후 각 지역에 건립되는 서원은 대부분 이러한 배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1597년) 때 소실되었으나 1612년 현재 자리에 다시 세웠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헐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현장 안내판 발췌)
* 제향 영역
제향 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당과 전사청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건물 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남계서원은 서원의 제향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뒤쪽에 자리잡고, 강학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앞쪽에 자리잡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원 배치 형식이다.
사당은 실제적으로 서원 향사를 거행하는 곳으로, 아곳에 성현의 위패가 모셔저 있다. 그래서 이곳은 어느 공간보다 엄숙하고 경건한 곳이어서 단정한 복장을 갖추고 성현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곳이다. 사당 오른쪽 담장 밖에는 별사가 있었는데, 서원 건립 후 뇌계 유호인 선생과 송탄 정홍서 선생을 모셨으나 서원 철폐령 때 헐었다. (사당 내 안내판 발췌)
* 풍영루(風詠樓)
풍영루는 유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손님이 오면 학문을 토론하고 정담을 나누기도 한 누각으로, 창건 당시 '준도문 (遵道門)'이라고 하는 출입 삼문이었으나 후에 다락집을 올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논어의 내용 중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쏘이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라는 증점(曾點)의 뜻을 바로 여기서 느낄 수 있다하여 풍영루라 이름 지었다. '기수'와 '무우'는 춘추시대의 전설 속에 나오는 곳이다.
출입은 사당의 내삼문과 함께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가는 형태로 기문은 정여창 선생의 후손인 조선 말기 문장가 오담 정환필(梧潭 鄭煥弼)이 지었다. (현장 안내판 발췌)
@ 남계서원 입구 풍영루
@ 강당인 명성당과 사액 현판인 남계서원
@ 맨 윗쪽에 위치한 사당 우측 전경
@ 맨 윗쪽에 위치한 사당 좌측 전경
@ 사당의 내삼문에서 내려다 본 사원과 앞 풍경
@ 강당 내부 현판인 명성당
@ 동재 아래 위치한 비각
@ 남계서원의 정문인 풍영루의 안쪽 현판은 준도문(遵道門 ; 도를 따라 배우다)라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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