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43편 ; 최치원 역사공원(함양 2)

푸른나귀 2023. 9. 22. 19:08

1. 들어가며

 

    오전 상림원 답사를 마친 후 오후에 최치원 역사공원으로 발길을 하였다. 역사공원은 천년의 숲 상림공원과 연계하여 함양군이 2018년 4월에 준공하였고 함양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선생의 덕과 학문, 애민정신을 기리고자 조성하였다고 한다. 입구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좌측으로 선생의 일대기를 벽면에 빼곡하게 구성해 놓은 역사관이 있으며, 우측으로 상림원의 조성역사 흐름에 대하여 전시한 상림관을 배치하여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문화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계단 위쪽으로 정문인 외삼문이 축조되었으며 안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배치된 고운 기념관에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대체로 근래에 축조된 건물이고 단청이 없어 고색창연한 미는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지역만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모습에 갈채를 보낸다.

 

 종래 한국 소설은 김시습(1435~1493)의 「금오신화」를 최초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와서 나말여초(羅末麗初) 작품으로 보여지는 「최치원전」을 최초의 한문소설이라는 학설로 옮겨지는 상태이다. 「최치원전」의 작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치원이 중국으로 유학을 가던 시절의 배경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어 최치원을 연구하는데 많은 자료가 될 수 있다. 함양의 최치원 역사관에서도 「최치원전」을 근거로 하여 최치원의 어린시절을 말하고 있다. 또한 성주사의 '낭혜화상탑비'에 수록 된 진성왕이 최치원에게 "그대는 일찍이 중국에 가서 벼슬길에 올라 입신출세하고 금의환양 하였다. 돌아보건대 경문왕은 그대를 국자감의 학생으로 선발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고, 헌강왕은 그대를 국사(國士)로 간주하여 예우하였다. 그러니 그대 역시 국사(國師)의 명(銘)을 지어서 보답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하며 성주사의 주지로 있다가 타계한 낭혜화상의 비문을 짓게되는 경위를 밝히기도 하였다.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최치원이 지은 네 편의 비문으로 네 곳의 산에 있는 비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령시 성주사의 '낭혜화상탑비', 하동군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령탑비', 경주시 대숭복사의 '초월산대숭복사비', 문경시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를 말한다. 이들 비문들의 내용으로 신라 말기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타입캪슐과 같은 중요한 자료로써 그 역활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신라 말기 최고의 문장가로, 시인으로, 사상가로 혼란한 격변기를 지내면서 외롭고 고독한 일생을 살아야 했던 고운 최치원 선생은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있어 최치원, 김시습, 허균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줄기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참고자료

 

    @ 위치 ;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938

                     

      * '공부의 신' 최치원

       선생은 신라 현안왕 첫 해인 서기 857년 경주 남천에서 태어났고 자(字)는 고운(孤雲)이다. 「최고운전」에 따르면 그는 풍모가 수려하고 성품이 온유하며, 특히 글 공부를 좋아하여 이미 네 살 때부터 글을 배워 열 살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읽을 정도였으므로,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최치원은 868년(경문왕8)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세에 과거(빈공과)에 급제하였다. 아버지 최견일은 당나라 유학을 떠나는 아들 최치원이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라면서  " 십 년 안에 진사시험에 급제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부지런히 힘써라." 고 하였다. 최치원은 '인백기천(人百己千), 남이 백번을 하면 나는 천번을 하는' 노력을 다 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나라에 머물면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애썼던 것이다.

 당나라 희종 6년에 황소(黃巢)가 난을 일으키자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 「토황소격문」을 지어 그 이름을 중국 천하에 떨쳤다. 28세에 귀국하여 벼슬을 받아 태인, 함양, 서산 여러 고을 태수로 다녔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여 관직을 버리고 자연 속에 뭍혀 살다가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 (최치원 동상 옆 안내판 참조)

 

   @ 함양문화회관 쪽에서 최치원 역사관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 공원의 정문인 고운루(孤雲樓) 누각

   @ 역사공원 내 문창후 최치원 선생 동상과 고운 기념관

   @ 최치원 선생의 좌우명이랄 인백기천(人百己千 ; 남이 백번을 노력하면 자신은 천번 노력한다.)

   @ 역사관 내 사산비명(四山碑銘 ;최치원이 지은 네 편의 비문)이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