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백령도는 3천여 가구에 약 오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한국동란 당시 이주한 황해도민과 원주민, 그리고 군복무하면서 정착한 다양한 형태의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협정이 되어 3.8도선 이남의 해주, 장연 등이 북으로 귀속 되면서 서해 5도는 경기도 옹진군으로 편입 되었다가 인천광역시로 다시 편입이 되어 생활권이 인천으로 변하게 된다.
섬의 면적이 51Km2로 인천에서 228Km 떨어져 있지만, 황해도 장연과는 불과 17Km 떨어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대체로 섬지역들은 어업을 주 산업으로 하나, 평야가 많고 물이 풍부한 백령도는 농업인구가 어업인구보다 약 세배나 많아 농업이 주업이며 식량 자급도는 섬 전체인구를 먹여살리고도 남아 육지로 내보내는 정도이다.
주민들의 종교 믿음 형태를 보면 대부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80% 정도란다. 불교 사찰은 근래에 들어온 곳이 한 곳이 있으며, 천주교 성당은 천주교 박해 당시 중국과의 밀입국 통로로 이용되면서 오래전부터 교우들에 의해 신앙이 지속되었고 천주교 순례지로 교인들의 답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백령성당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자 천주교 선교사의 입국로를 개척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진촌리에서 심청각으로 가는 마을길 안쪽으로 위치한다.
중화동 교회는 장로교회로 1898년 중화동에 위치한 한문 서당에서 예배를 보면서 시작되었다. 기록으로는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라고 한다. 부지내에는 한국 기독교 100년사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백령기독교 역사관이 설치되어 신도들에게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오래된 종탑과 고목인 향나무가 신앙의 그윽함을 풍기는 전경이 소담스럽게 느껴진다.
역사관에 들러 각종 자료를 훓터보는 가운데 '백령 중화동 교회 설립사'의 내용 중 '1816년 영국 해군의 머레이 맥스웰(Murray Maxwell) 대령이 이끄는 서해안 해로탑사와 선교를 병행 중이던 팀으로부터 첫 복음이 중화동에 떨어졌고, 1832년 귀츨라프 선교사가 중화동에 들려 전도를 했다.'라고 설명한 대목이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첫 선교사에 의한 첫 선교지로 주장하는 지자체들이 유적지로 발굴하고 기념공원을 조성을 하는데, 군산의 어청도, 서천의 마량진, 보령의 장고도에 이어 백령도까지 귀츨라프 선교사의 최초 선교지 논쟁에 불이 붙는 것 같다.
2. 참고자료
@ 최초의 기독교 복음 전래지, 중화동 교회의 창립
중화동 교회는 당상관(堂上官) 허득공(許得公)의 주도로 주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자생(自生)교회이며 백령도의 모교회(母敎會)이다. 당시 나라안은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백성들의 불만은 동학난(東學亂)으로 발전하였다. 동학군의 토벌이 끝나고 백령도에 돌아온 허득공은 교회설립의 의욕으로 넘쳐 있었다. 이때에 백령도에 유배왔던 3명 중 김성진공(金聲振公)이 조카(감리교 신자)에게서 받은 성경책을 가지고 있었기에 허득공은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1898년 6월에 선교에 대한 해금이 풀렸고 1898년 10월 9일(일요일) 중화동의 한문 서당에서 많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경조(徐景祚) 장로의 집전으로 중화동 교회가 설립 되었다.(역사관 안내 판넬 참조)
@ 백령도는 천주교 선교사의 해로 입국 거점
한국천주교회의 초기에 몇몇 선교사들이 중국의 변문과 의주의 관문을 통하여 조선에 입국하였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앵베르(Imbert) 주교, 모방(Maubant), 샤스탕(Chastan) 신부가 1839년에 잡혀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의주로 통하는 육로로 입국한 사실이 드러났고, 그 후 정부의 경계강화로 인하여 육로입국은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미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페레을(Ferreol) 주교는 1846년 김대건 신부에게 해로를 통한 밀입국로를 개척 하라고 지시했다. 김대건 신부는 백령도를 거점으로 하는 밀입국로를 페레을 주교에게 건의했다. 백령도는 중국 산동반도와 매우 가깝고 매년 봄에는 그 근해 어장에 중국 어선들이 모여드는 것에 착안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중국 어선으로 백령도 근해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조선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입국하는 방안이 채택 되었다. 1846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는 서울 마포를 출발, 백령도에 도착하여 앞으로는 선교사들이 백령도를 통한 밀입국로를 이용하라는페레을 주교의 서한을 중국 선원에게 전달한 후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착안과 개척의 덕으로 백령도는 1846년도 부터 1880년까지 프랑스 선교사 17명의 해로 입국 거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중 6명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1984년 서울 여의도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집전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 미사중에 성인품에 올랐다. 백령도를 거쳐 입국한 선교사들의 이름과 입국년도는 다음과 같다. 1997년 9월 20일 천주교 인천교구 백령도 성당 (진촌리 백령성당 앞 안내판 발췌)
@ 중화동 마을에서 올려다 본 중화동교회
@ 백령 기독교 역사관 앞에서 바라본 단층 교회와 첨탑, 그리고 수령이 오래된 향나무.
@ 교회의 종탑 앞에서 바라본 교회 전경
@ 지금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중화동 교회의 내부 전경
@ 백령도에 기독교가 전래된 역사적 배경을 알리는 역사관
@ 역사관 내 전시물
@ 진촌리에 위치한 백령 천주교회 전경
@ 측면에서 바라본 천주교회 전경
@ 백령도 천주교 순례길과 공소를 알리는 현관 앞 계시판
'지역 외 유적지 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4편 ; 용기포 등대해변(백령 5) (0) | 2023.06.24 |
---|---|
제33편 ; 사곶천연비행장과 콩돌해안(백령 4) (0) | 2023.06.24 |
제31편 ; 두무진 지질공원(백령 2) (0) | 2023.06.21 |
제30편 ; 두무진 비경길 (백령 1) (0) | 2023.06.17 |
제29편 ; 어청도 봉수대 (군산 4) (0) | 2023.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