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29편 ; 어청도 봉수대 (군산 4)

푸른나귀 2023. 5. 23. 19:58

1. 들어가며

 

  조선이 건국 되면서 중앙권력을 강화하고 지방행정을 원활이 하고자 역참과 봉수제도를 정비하고 강화하였다. 조선팔도의 변방 네 곳에서 출발하는 봉수로는 도성으로 위급함을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통신수단으로 한동안 자리매김을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봉수대의 관리가 소홀해지며 효능이 떨어지자 폐기하게 된다.

 

 어청도의 봉수대는 서해로 침범하는 외적의 동태를 어청도에 알리고, 어청도 봉수대는 녹도를 경유하여, 녹도, 원산도, 망해정을 연결하여 충청수영으로 전달되는 지방관의 관할하에 설치되었던 권설봉수였다. 

 섬주민들에게 봉수대를 설치하고, 외적을 감시하며 관리의 의무 등을 부여하면서 특별한 혜택이 주어지지 않음에 애초에 의도한 대로 역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날씨가 궂으면 봉수의 효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한동안 유지 되었으며, 오늘날의 통신수단과 비교해도 시스템은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외연도 봉수대는 상당히 붕괴되어 있기는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무턱댄 복원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좀더 확실한 고증을 통한 복원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민의 무관심 속에 문화유산으로 등재도 되지 못하고 으름넝쿨 속에 묻혀 스러져가는 형편이라 아쉽게 생각 되었는데, 어청도 봉수대는 그나마 지역 향토문화재로 등재를 하고 주변을 단장 하였으며 원형에 가까운 복원을 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궁이가 없고, 상부에 불을 때던 구덩이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큰 오류는 없는 것 같다.

 다만, 현장 봉수대 안내판에 ' ...보령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라는 문구는 충청수영 관활하에 운용되던 권설봉수였다는 사실이 여러 학술자료에 의해 증명 되었는데도 추정이라는 비확실성을 깔아 놓은 문구가 눈에 거슬린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어청도의 봉수대가 충청수영의 권설봉수 시작점이라는데 중요한 의미를 두고 서해를 수호하는 전초기지였음을 알리는 중요한 시설물임을 널리 알려 보존하였으면 한다. 

 

 아울러, 봉수대 바로 아랫부분에 당집이 있었던 터가 보이는데 정비를 하고 안내판을 설치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겠다. 공치산 아래 '해막너미'라는 지명도 어청도 마을에서 당제를 지낼 때 임신부가 있으면 해를 입는다하여 산모를 옮겨 아이를 낳던 풍습이었는데 그것과 함께 이야깃거리로 보존하는 것도 좋겠다.

  

  

2. 참고자료

 

     @ 위치 ;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리 98-8

     @ 지정 ; 군산시향토문화유산 제9호

 

     어청도 봉수대(於靑島 烽燧垈)는 어청도의 주봉인 당산(198m) 정상에 있으며, 원추형의 2층 석축으로 높이 2.1m, 지름 3.6m의 규모이다. 고려 의종 3년(1148) 처음 설립된 것으로 추정 되는데 당시의 봉수대는 주로 남으로부터 침입하는 왜구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어청도 봉수대는 서해로부터 오는 외적의 감시 및 경계를 목적으로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어청도 인근 도서인 외연도에도 유사한 봉수대가 남아 있으며, 녹도, 원산도를 경유하여 연안의 보령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청도 봉수대는 조선 숙종3년(1677) 외연도, 녹도의 봉수대와 함께 운영관리상의 문제로 인하여 폐지된다. (현장 안내판 발췌)

 

   @ 당산의 정상에 세워진 어청도 봉수대 전경

   @ 봉수대의 후면 전경

   @ 봉수대의 측면에 설치된 안내판

   @ 봉수대의 상부로 불을 피우던 곳이 움푹하게 패여있다.

   @ 봉수대에서 팔각정쪽으로 약간 내려오면서 좌측으로 당집이 있었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