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55편 ;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보령땅

푸른나귀 2022. 5. 17. 17:06

1. 들어가며

 

   직접 전국을 걸어 다니면서 대동여지도를 작성한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는 이전까지 제대로 된 우리나라의 지도가 정확하지 않음을 아쉬워 하면서, 실학적 고증으로 심혈을 기울여 각 고을 군현의 경계를 확실하게 표기하고, 여기에 덧붙여 산, 강, 섬 그리고 나루, 봉수, 성곽 등을 표시함과 동시에 지역 간의 거리까지 지도에 표기함으로 사용에 용이하도록 추구하고, 더불어 역사적인 사실까지 함께 수록하고자 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철종 12년(1862년)에 완성된 스물 두 장의 첩으로 작성되어 있는데, 이것을 펼치면 우리나라 전도가 되는 지도로 보물 제 850-1호로 문화재 지정이 되어 서울역사 박물관 및 성신여대 박물관,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다.

 지금은 대동여지도를 현대적 감각으로 출판한 책들이 다수 있어서 그 시대의 시대상과 산천을 일목요연하게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보령땅이 남포현과 보령현으로 나뉘어져 있었기에 현재의 지도와 비교하여 차잇점이 무엇인지 확인하여 보고 그 시대에 이곳을 터전으로 하여 살아온 민초들 삶의 한 귀퉁이를 엿보고자 한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보령현의 경계는 오서산 정상에서 광천천을 따라 오천의 충청수영성을 감싸고 고만의 송도를 포함하여, 남포앞 바다의 목섬, 월섬, 육섬, 소섬을 포함하고 오대산(?)으로 올라타며 다시 오서산으로 둘러쳐지는 경계를 표시하였다. 원산도를 위시한 서해바다 대부분의 섬들과, 지금의 천북면인 흥양이 흥양곶(봉화산) 봉수대를 포함하여 홍주의 관할지역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아가 있는 보령에서 충청수영이 있는 영보정까지 20리로 표시되고, 청양까지는 60리, 광천까지 30리, 보령까지 30리로 표기하여 거리를 시각적으로 나타내었다. 오천의 영보정 앞에 한산사라는 사당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조침산에 봉화대를 표기하여 남포 잔미산(봉화산,옥위봉)에서 조침산으로 받아 흥양곶 봉화대로 연결되는 봉수로로 순천 돌산도 방답진에서 서울 목멱산에 위치한 경봉수에 이르는 제5 횃불 중 하나의 간봉을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정보통신망이었다.  

 오서산(烏棲山)의 산이름이 지금과는 다르게 오사산(烏史山)으로 표기되어 있어 관심을 갖게된다. 보령현의 관아 뒷산이 당산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지금의 진당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지금의 봉당천을 중심으로 보면 산맥과 하천의 방향이 약간 다르게 보인다. 고만이란 섬도 육지화 되었고 간척지 사업으로 해안선이 변화되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윤곽은 나타난다. 청연에 역참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오서산 아래 큰 동네로 청라동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지금의 대천시내 중심지는 일제 강점기 이후 철도가 생기면서 도시화 되었지만, 그 전에는 청라동의 입구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대천천의 원래 이름도 화암천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주산에서 한 줄기 산맥이 흘러내려 오대산(五坮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화암천과 남포천의 사이를 말하니 지금의 왕대산을 말하는 듯하다. 

 

 남포현의 경계는 성주산의 정상에서 오대산을 경유하여 군입포와 서해의 여러 섬, 그리고 웅천포 입구를 지나 갈마재와 월명산, 아미산, 성태산을 경유하여 성주산을 감싸는 경계를 하고 있다. 

 남포에서 비인까지는 40리, 홍산까지는 60리로 표기되어 있고, 구 마량진과 고읍이 웅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옥마산 산줄기에서 봉수대가 있는 옥위봉이 따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 표기한 것 같다. 산맥으로 보아 이현고개로 표기된 이어니고개 전의 잔미산 정상에 봉수대의 흔적이 있기에 한 번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대천으로 표기된 하천이 청연포에서 옥마산으로 줄기를 이어가는데 남포천과 오해를 했을리는 없는데 이해가 되질 않는다. 대천은 웅천천의 옛 이름이라 할고 있는데 말이다. 

 성주산 아래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고운비(孤雲碑)'라고 표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현대의 인터넷 위성사진으로 검색하여 쉽게 익숙해져 있는 지도를 160년 전의 지도와 비교하면 정확도가 한참 떨어지지만, 실학사상을 추구했던 조선시대 지식인 층에게는 대동여지도의 발간은 획기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당시에 권력층은 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여 백성을 위한 위민정책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독도나 이어도, 또는 대마도가 우리의 땅이라는 확실한 증거들은 이러한 고증자료에 의해서 주장할 수 있는데, 옛 선인들이 그 중요성을 간과하여 후손들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닌지? 

 남아 있는 자료 뿐만 아니라 새로 발굴되는 사료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의 연구물이 지속적으로 나오길 바라고, 많은 사람들이 고지도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 대동여지도에 표기 된 서산, 홍주, 보령지역 

   @ 대동여지도에 표기 된 부여, 서천, 옥구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