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추풍령 고개를 넘어 경상도땅에 들어서게 되는데, 처음 만나는 도시가 김천이다.
보령에서 김천까지의 거리는 약 190km 정도이며 차량으로 이동할 때 약 세 시간 정도 걸린다. 우연히 김천에서 하루를 보낼 일이 생겨 인터넷으로 살펴보니 시정의 규모가 보령시와 비슷함을 알게 되었다. 물론 시로 승격된 것은 김천이 오래이고, 인구의 수도 김천이 14만 여 명으로 보령보다 4만 여 명이 많았다. 보령이 내륙과 해안을 겸한 도시이지만 김천은 내륙도시여서 깊은 산간과 계곡이 발달되어 있다.
보령에서 사명대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살펴보던 중, 밀양에서 태어난 사명대사가 김천의 직지사에서 불문에 입문하였다는 자료를 보아서인지 바로 직지사에 다녀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악산(해발 1,111m) 줄기 아래 포근한 산세로 감싸안은 풍광이 제법 웅장한 가람을 형성하고, 많은 불자들이 해탈을 하기위해 예부터 수련의 장으로 이어져온 것이 느껴진다. 직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대웅전에 들러 예를 올린 후에 좌측으로 있는 사명각에 들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현액이 박정희의 글씨란다. 유신헌법을 공표하고 영구적인 권력을 갖고자 하면서 호국을 국민들에게 강조하던 그의 기운이 여기에도 미친 것 같아 씁쓰름 했지만, 그것 또한 역사 속의 한 페이지로 지울수 없는 흔적이었음을 인지하게 된다.
사명대사가 불살생의 계를 어기면서 칼을 뽑아든 것이 군주만을 위한 것이고, 호국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후세에 이렇게 추앙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백성들의 파단지경에 이른 외세의 침략에 분연히 일어나 백성들을 위해 칼을 들었기에 불자의 존경심이 지금까지 이어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개발독재에서 '나 아니면 않된다'는 권력의 욕심을 어느정도 접어두었더라면 현액을 쓴 양반도 모든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았을텐데 하는 상념을 가져본다.
사찰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박물관을 답사하였다. 가야와 신라의 판도였던 지역적 특성이 유물로 남아있고, 구석기시대부터 이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가지런히 남아있다. 특히 복제하여 전시한 비파형청동검은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한 박물관의 성의가 느껴진다. 사진과 영상으로 아무리 좋다고 전시해도 실물소장이 가장 으뜸이며, 정 귀중하여 전시가 불가능 할 때에는 근사치에 가까운 복제품이라도 이해하기 쉽도록 배치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김천 박물관의 규모는 보령의 박물관에 비해 효율성 있고, 배치공간이 넓었다. 인구대비 1.5배의 효용이 더 차이가 나는듯 싶다.
사명대사가 직지사에서 수행한 기간이 15년에 가름하니 지역의 자긍심이 대단한 듯 보였다.
직지사 입구에서 산자락으로 펼쳐진 사명대사 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이 즐겨찾는 장소로 만들어 문화, 생태, 체험형 관광지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대형 물레방아와 목조 오층 평화의 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위용을 자랑한다.
2. 직지사 사명각
@ 위치 ;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직지사 경내)
@ 내용 ;
1) 사명각 및 사명대사 ; 사명각은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진영(塵纓)을 봉안하여 대사의 자취를 기리는 건물로 조선 정조 11년(1787)에 창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으로 중창한 것이다. 현판도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구식 기단 위 자연석 초석을 설치하였다. 일출목이익공 양식이며 부연을 덧달아 낸 겹처마 형식이다.
사명 유정(惟政, 1544~1610)은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승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성사의 법명은 유정, 호는 송운(松雲). 사명(四溟)이고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명종 15년(1560) 이곳 직지사(直指寺)에서 신묵화상(信黙和尙)의 제자가 되었다. 출가 후에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서산대사를 찾아가서 참선, 수행하며 진리를 탐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 67세를 일기로 가야산 해인사에서 입적하였다.
2) 사명대사의 행장 ; 성사는 직지사에서 출가 후 1561년(18세) 승과(僧科)의 선과(禪科)에 합격 하였으며, 이후 당대의 거유 노수신(盧守愼) 등에게 수학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1573년(30세)에 직지사 주지를 맡았으며, 1575년(32세)에 선종 수사찰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3년 동안 서산대사를 모시며 선지(禪旨)를 맛본 후 금강산 보덕사,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등지에서 수행의 깊이를 더하였다.
성사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수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건봉사(乾鳳寺)에서 150명의 승군을 모집하여 서산대사와 합세하였다. 1593년(50세)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된 성사는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사는 악견산성(岳堅山城), 이숭산성(李崇山城), 용기산성(龍起山城),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 등을 수축하고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성사는 스승 휴정의 열반 소식을 듣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왕의 부름을 받아 강화사절로 대마도를 경유해 일본에 들어가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조약(1605)을 체결하고, 잡혀갔던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 하였다. 1607년(64세)에 치악산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해인사로 수행처를 옮겼다.
그리고 1610년(67세)에 해인사에서 가부좌를 튼 채 조용히 좌탈입망(坐脫立亡) 하였다.
3) 사명대사의 사상 ; 사명성사의 생애에서 불교의 호국사상(護國思想)과 중생구제(衆生救濟) 사상을 읽을 수 있다. 임진왜란 초기 사명성사는 불법(佛法)으로 왜군의 칼을 거두게 하여 9개 군을 수호했다. 사명성사는 잔혹하고 무자비하기 이를 데 없는 왜군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감화함으로써 물리친 것이다. 이러한 사명성사의 사상은 출가수행자로서 대승불교의 보살행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사는 불살생의 계를 지키는 일과 왜군과 맞서 싸움으로써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백성을 지키는 일을 놓고 고뇌한 끝에 분연히 일어서서 왜군과 맞서 싸우는 길을 택하였다. 이는 작은 악으로 더 큰 악을 막는 계차법(階差法)의 지혜이기도 하였다.
수행자답게 사명성사는 전쟁이 끝나자 산사로 돌아갔다. 성사의 활동은 자비심으로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지 자신의 공명을 탐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성사는 애오라지 자비행을 통한 호국애민의 실천으로 살다간 구국의 스승이다.(현장 안내문 발췌)
@ 황악산 직지사 외삼문(東國第一伽藍黃嶽山門,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
@ 직지사 대웅전
@ 대웅전 옆의 사명각
@ 사명각 내 사명대사 초상화
@ 사명각의 처마선
@ 사명각 앞 사명대사의 안내 표지판
@ 직지사 입구 사명대사 공원 목조탑(평화탑)
@ 직지사 옆 김천시립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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