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글

소멸(2)

푸른나귀 2016. 7. 2. 21:01


소형 백호우(포크레인)가 파놓은 것은 한자 반 폭에 여덟자 길이, 1미터 깊이의 각진 흙구덩이이다.

백호우의 바가지 폭으로 곧바로 파 놓은 것은 어찌보면 장정 서넛이 몇 시간 삽질 해야만 팔 수 있는 일을 한 순간에 뚝닥 해치우곤 시동을 꺼 놓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승에 계신 염왕은 두루두루 저승에서 쓸 요량으로 이승 사람을 데려가는 모양인지 몇일 사이로 고향에 계시던 어르신들이 불리어 가니 이승의 산자는 망자를 배웅하랴 오르락 내리락 바쁘게 한다.


서남쪽으로 펼쳐진 너른 벌판을 바라보며 깊숙한 골짜기를 이루고 오래전부터 교하노씨 집안이 집성촌을 형성했던 안골은  내가 어렸을 때 외갓집으로 자주 찾아와 지냈던 마을이다.

맨 위쪽에 은행나무가 커다랗게 자라던 큰댁의 어르신은 사랑방에서 그 일대의 학동들을 가르치던 서당이 운영되었고, 워낙 완고하고 엄하여 해방후에도 여자들은 초등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오로지 아들에게만 신식의 교육을 시키던 그런 동네라 우리또래 이후의 여자아이들 때에서야 초등학교를 다닐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명절때 그 동네에 인사하러 가보면 유독 동창이더라도 뒤곁에 숨어서 지켜보던 모습이 생각난다.


잘 다듬어진 선산의 잔디 한포기 풀 한포기가 돌아가신 어르신이 생전의 살던집 건너편 양지녘에 자리를 잡고 매번 손을 보면서 지내셨다 한다.

그 분 역시 안골동네의 어르신으로 엄하시고 호탕하셨는데 아주머니를 먼저 보내시고 혼자 큰집을 지키며 살아 오셨다.

몇해전 인사차 안식구와 그집에 들르니 사랑방에 홀로 앉아 라디오를 듣다가 반가히 맞아주며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찾으시기에 됐다고 사양을 하는데 나무토막을 잘 깍아 만든 것을 내밀으시며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실패여... 내가 심심해서 오동나무를 깍아 사포로 문질러 만든 것이니 너희 삼형제 하나씩 나눠 가져라"며 건네 주었다.

요즈음 실패를 쓸일도 없지만 그래도 그 후 나는 남동생과 여동생에게 실패를 나누어 주고 우리집에도 이불꼬매는 실을 감아 두고 쓰고 있다.

올 봄에 몸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 하셨다는 말을 듣고 병문안을 잠시 다녀 온적이 있었다.

내 아버지와 그분과는 동창이면서 재종처남매부지간이 되기때문에 안골에 들리면 꼭 인사를 다녔다.

힘들게 살던 시절 그분의 큰딸도 시집 가기전 서울의 비좁은 우리집에서 한동안 같이 살기도 하였었다.


생전에 그래도 내가 안골을 찾아가면 반겨 주시던 어르신이 이젠 동구앞 소나무 밑 잔디밭에 누워 그 앞을 지나가는 내 자동차를 바라보며 왔느냐고 손사래 치실려나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장지에서 재승이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그래도 청라 구석에서 사무관 나오는게 흔치 않은데 이골에서는 나왔어"

그리보니 청고을에서 서울대학 나온것도 이곳이 처음일거고, 검찰총장도 이곳에서 나오고...

그분의자식중엔 육사출신에 대령까지 달고 있고, 외손주중에 판검사도 있으니 안골물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나 역시 안골물이 반쯤은 섞여 있으니 세상에 이름을 쬐금은 남겼어야 했는데 무명씨로 남게 되었으니 내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안골동네에 인사를 다닐 어른이 몇분 생존해 계시지를 않는다.

지팡이를 집고 장지에 모이신 어른들께 인사를 여쭙지만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서먹함이 더욱 배인다.

어려서 뛰놀던 친구들도 형님동생도 낯이 섪어 머뭇거리게 된다.

이젠 외지인들도 많아지고 씨족사회도 무너져 버린 안골길을 걸으면서 나의 뒤안길도 쓸쓸한감이 흘러 가는 것을 느끼게 한다.

과연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이며 제대로 가고 있는 것 일까???


 

                                                                                (하늘공원의 쪽두리꽃과 봉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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