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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에 대하여(2)...

푸른나귀 2008. 12. 6. 17:10

 

 

     하나; 우리나라의 고대사에 대하여서는 보편적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여 밝혀진다.

             삼국사기는 1145년 인종때 김부식이 왕명에 의하여 중국의 금나라에의한 압력에 저항하

             고자 주로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중국의 고서들을 총망라하여 집대성

             하였다.

             일부 사학자들간에는 중국의 고서들을 참조하였기에 사대주의 사상에 빠져 있 다고들

             비판도 하지만, 우리의 고대사를 바로보기에는 기초적인 자료임에 틀림없다.

             삼국유사는 고려후기 고승 일연(1206~1289)이 고조선에서부터 후삼국시대까지의 신화,

             전설, 신앙,향가등을 집대성해 놓아 그 집필당시 고려말 무신정변과 몽고에의한 외침에

             저항하고 민족적사고를 고취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나는, 젊은시절 한문공부를 하기위해 삼국유사의 번역본을 보면서 한문을 익혔었는데

             한문공부보다는 삼국유사에 실린 전설과 신화에 더욱 매료가되어 수없이 읽어보게되고

             그에따른 역사나 신화에 억매어 지금도 그런 부류의 책을 즐겨 읽게 되나보다.

 

 

   두리; 단군조선(사실 조선이라는 국호가 맞다. 일제시대 단군조선과 이씨조선이라고 평가절하한

           호칭을 아직도 쓰고있는것이고, 조선인민공화국이란 명칭때문에 더욱 거부감을 갖는것인지

           도 모른다.) 보다도 요즘은 부여에 대하여 많이들 회자되고 있다.

           고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하기까지 2500여년의 잊혀진 역사속에서 그나마 우리의 뿌리인

           부여에 대하여 사극을 통해서나마 조금은 이해할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으로 생각되는지 모른다.

           사극이 실제역사의 진실이 될수는 없어도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에는 큰 도움이 된다.

           부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왕도 시들어가는 부여를 부흥시키기위해 대단히 노력한 인물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가 부여에 있고, 부여의 뿌리가 고조선에 있슴은 간과해선 않된다.

 

 

   서이;부여와 초기고구려는 왕권이 강화된 국가가 아니고 각 부족이 연합하여 형성된 집단체제였다.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여 졸본부여로 옮겨 고구려를 세우고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져 했지만

          각 부족들의 힘을 뿌리칠수가 없었다.

          지금의 시대에도 권력가와 재력가와의 협력관계를 볼수있듯이 정략적인 혼인관계등으로 융합이

          될수밖에 없었다.

          부여에서 결혼한 예씨부인에게서 태어난 유리도 "일곱모난 바위위에 자라는 소나무밑의 증표"를

          찾아 고구려에 와 주몽에게 자식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이미 다시 정략결혼한 비류부의 소서노와의

          결혼으로 두게된 왕자 온조와 비류와의 경합에 뒤흔들리고 만다.

          결국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으매 비류와 온조는 남쪽으로 이동을 하여 첫째 온조는 한성위례성

          (몽촌토성)에 자리잡고 둘째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도읍을 삼고 초기 백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백제멸망때까지 비류백제의 원류가 왜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비류라는 부족의 이름은 가히

          대단한 위력을 가진 힘이라 하겠다.

 

 

    너이;동명성왕이 죽고 유리왕도 역시 선대왕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왕권을 가지지 못하였다.

           조각난 칼조각의 신표를 가지고 태자에 책봉되었으니 각 부족장으로부터 신임을 받기까지

           수 많은 난관에 부딪칠수밖에 없었을것이다.

           비류국의 송양의 딸과 결혼한후 왕비가 죽자 계비로 화희와치희를 삼았는데 화희의 시기심으로

           치희가 도망을 가자 그 유명한 '황조가'를 읊게 된다.

           유리왕은 황조가에서 보듯 감성이 풍부한 소유자로 주변국과의 마찰을 경계하고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데 치중한 반면 그의 아들 해명태자는 주몽의 피를 빼 닮아 강경하고 영웅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유리왕과의 마찰이 심했던것 같다.

           하지만, 유리왕은 속 내심엔 정권이 안정되고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후에 북방의 고조선의 땅을

           회복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것도 분명하다.

           사극과는 달리 유리왕은 무휼이 어린시절 태자로 책봉되고 영토를 넓히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야욕을  아들에게 전수하여 제3대 대무신왕이 큰 업적을 이루게 하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다섯; 대무신왕의 아들중 호동왕자가 있다...

            호동왕자의 죽음에도 정략과 계략이 숨겨져 있다...

            이천년전의 역사속에 현대사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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