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내 할머니는 이따금 내게 이런말씀을 하시었다...
"너 어렸을적에 아침나절만해도 안방에서 잘 기어 다니다가 갑자기
기운이 빠지고, 맥이 흐릿해져 웃방으로 옮기고 죽어가는것을 바라
보기만 하였다.
밤늦게 면사무소에서 돌아온 네 애비가 너를 둘쳐업고 정신없이 원
무루 박(?)초시 영감에게 사정사정을 하여 침한대 맞고 살아났단다.
그때는 면허없이 침을 놓는것을 단속하던 시절이라, 그 영감은 죽어
도 침을 놀수가 없다고 돌아서는것을 애비와 나는 손주 살려 달라고
얼마나 애원했는지 모른다.
나중에라도 꼭 한번 그영감님을 �O아가 인사라도 드려라..."
할머님 돌아가신지 십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내가 모르는 추억속의
사경을 벗어난지 오십년이 흘렀으니 이젠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
도 내 부모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나 자신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영감을 �O아가 인사드리는것을 행하지 못하였다.
젊은시절 한번은 �O아뵈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가져본적도 있었지만
특별하게 내 직접 경험이 아니었기에 회피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내 성장과정의 인성에
비중있게 작용되었슴을 느끼게 된다.
서울살림 어렵게 치루면서도 할머닌 친척들의 자식들을 한둘은 먹이
고 재워주면서 서울에서 살수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시느라 고생하셨다.
그런것들을 보며 자란 내가 지금의 내 인간성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본다.
결혼하고 내짝을 만나 가정을 꾸려가면서 이따금 도심권과 향리의
문화적 충돌이 생길때도 있었지만, 보편적으로 내 의향에 맞춰진것
은 나의 고지식한 면을 마눌님이 숙여주는 양보심이었을 것이다.
불전 30
서로이웃 300
유니세프 12
작년 수익의 지출 일부분이다.
땡초중이 불전함에 올린것을 추어탕값에 썼는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썼는지 나는 모른다.
그들이 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지 �렘탔繭箚� 비웃을지 나는 모른다.
아프리카의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의 몇일분의 끼니가 되었을지도
나는 모른다.
어느때부터인가 내 연봉의 10%는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마음에서
시행하고 있지만 돈병철의 아들이 고개숙이며 사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무척 크게 느껴진다.
한알의 콩알도 나눠먹으라 두쪽으로 나뉘어진것 이라는데...
분명 없는 살림에 인심이 난다 했다.
자식키우고 가정을 이루기위해 총대를 멘 우리들...
그치만 그 어려움을 알기에 베품이 있어야 한다.
내게는 자식들의 성장에 가장 힘든 시기이지만 그래도 내 자신의
평온을 위해, 인연을 보답하기 위해 나누려 한다.
내 육신이 허락하는한 직접 망치질을 못하고, 고무장갑을 못끼더라도
나누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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