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65

제15편 ; 중정 기념당(대만 1)

1. 들어가며 새해를 맞이하여 늦깍기로 함께 공부했던 학우들과 3박 4일간의 겨울여행을 다녀왔다. 타이완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와 아주 가까운 우방국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받았던 국가였지만, 냉전시대의 종식하고 자유시장경제를 우선시하는 북방정책에 따라 우리가 소련과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로 한동안 냉랭한 관계를 가졌던 마음 아픈 나라로, 경상남북도와 제주도를 더한 면적을 가진 섬나라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전국민 2천 4백만여명 대부분은 해안가에 형성된 평지에 거주하기에 실제의 인구밀도는 대단히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오위안(桃園,도원) 국제공항의 상공에서 바라본 타이완의 첫인상은 곳곳에 유수지가 많이 분포되어 있어 무엇일까 궁금하였다. 화련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

제14편 ; 문경새재(괴산, 문경)

1, 들어가며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동무들과의 겨울여행을 다녀왔다. 지난 가을 동창모임에서 괴산에서 팬션을 운영하면서 심마니 활동을 하는 동무의 초청으로 해안가 보령에 사는 동무들이 내륙 깊숙히 위치한 괴산으로의 풍광을 즐기려 떠나는 마음은 한껏 부풀기만 하였다. 세 시간 가량 가는길에 칠갑산 장곡사에 들러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고, 괴산으로 들어서자 산세가 보령과는 완연히 다르다. 우선 동무가 운영하는 팬션에 짐을 내리고자 칠성면으로 들어서니 군자산(946.9m) 아래 계곡 소금강이 우리의 눈길을 빼앗아 버린다. 여름과 가을이라면 녹음과 단풍이 반기었겠지만, 겨울 깊숙이 들어선 지금도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맛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 전, 월악산과 조령산 사잇길 문경새..

제13편 ;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여주6)

1, 들어가며 조선시대 왕릉은 고려 공양왕릉의 형식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규모가 커져서 분묘 주위에 곡장(曲墻, 담장)을 두르고 석마(石馬) 등 문무인석을 배치하는 방법을 취했다. 서울 근교의 양주, 광주, 여주 등의 배산임수한 명당을 찾아서 언덕 중턱에 분묘를 만들었다. 왕릉에 들어서는 입구에 홍살문을 세우고, 석교(石橋)를 지나 제실(齊室)인 정자각(丁字閣)에 이른다. 정자각 동쪽에는 비각이 배치되고, 정자각 뒤쪽으로 언덕 위에 분롱(墳隴)이 위치하는 형식을 갖고 있다. 분롱(墳隴)의 형식은 초기에 고려식을 따라 상자형 석실묘에 호석을 두었으며, 면석 상부에는 12지상을 조각하고, 석실 내부에는 천정에 일월성진도, 벽면에는 사신도를 그렸으나, 세조의 광릉(1467년)부터 광을 파고 관을 내린 후..

제12편 ; 신륵사의 부도(여주5)

1, 들어가며 사찰에 세워진 부도는 큰 스님이 입적을 한 뒤 제자들에 의해 사리를 모시는 무덤과 같은 존재이고, 부도탑비는 큰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전기나 다름이 없다. 부도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명문으로 새겨놓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명문을 표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탑비가 파손되거나 없어지면 주인공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주인공의 행적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원래 부도(浮屠)는 불(佛, Buddha)을 말하고, 부도(浮圖)는 탑파(塔婆, stupa)라는 뜻을 가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부도가 고승의 유골이나 사리를 안치하는 탑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신라의 부도는 기본형식으로 팔각당식(八角堂式)이 주를 이루며 석종형식(石鐘形式)이 일부 남아 있다. 신라 말엽과 고려시대 ..

제11편 ; 신륵사의 탑(여주4)

1, 들어가며 신륵사를 감아 돌아 도도히 흘러가는 남한강을 이곳 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곳을 본향으로 하는 가문에서는 본관을 여주, 여강, 여흥으로 쓰기도 하였다. 불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무덤으로 금당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부처님의 말씀과도 같다는 사찰의 상징성을 갖게 되는데, 대부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지는 않았더라도 그와 버금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신륵사에는 특별한 탑들이 있는데, 대리석과 벽돌을 사용한 석탑과 전탑이 그것이다. 대부분 사찰에는 석탑의 재질을 화강석으로 하여 비와 바람에 의한 풍화작용으로부터 영구적인 보존성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곳 석탑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되어있다. 대리석은 색상이 부드럽고 질감이 좋아 건축공사에서 실내 마감재, 또는 예술 조각품 등..

제10편 ; 신륵사 1 (여주3)

1, 들어가며 신륵사는 횡성과 원주를 관통하는 물줄기와 단양과 충주를 거치는 물줄기가 합류하여 사행천을 이루며 흐르다가 여주에 이르는 남한강변에 위치한다. 옛부터 한양에서 내륙 깊숙히 물류를 옮기던 황포돛배와 뗏목의 운행이 번성하였던 곳으로 시인묵객들의 발길 또한 그 못지않게 많았다고 한다. 여주를 본향으로 하는 명문가들이 많은 데, 한강을 통하여 도성으로 들어서기 가까워 여주를 근거지로 한 향족들의 중앙 정계 진입이 수월하였던 것도 한 몫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신륵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교구인 용주사에 속하는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진 않다. 신륵사의 홈페이지의 절 이름에 관한 유래를 살펴보면,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는데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절 앞 강변의 마..

제9편 ; 고달사지 2 (여주2)

1, 들어가며 문화재 지정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들이 있어왔다. 논쟁의 종류로는 숭례문의 국보 1호로서의 상징성 결여, 문화재 지정 번호 부여로 인한 서열화, 문화재 지정번호 폐지 시행의 미흡, 국보와 보물의 지정기준의 모호함 등이 지적된다. 사전적 의미에서 국보는 '나라의 보배로, 법률에 의해 정해진 중요한 문화재' 이고, 보물은 '매우 드물고 귀하여 가치가 있어 보배로운 물건, 또는 국보 다음으로 중요한 유형 문화재'라고 명시되어 있다. 문화재 보호법 시행령 제 23조에 따르면, '1)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을 보물로 정할 수 있다. 2) 문화재청장은 제1항의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문화재위원회의 ..

제8편 ; 고달사지 1 (여주1)

1, 들어가며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고려시대에 들어와 선종사찰로 국가가 관장하는 대사찰로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곳이란다. 창건 당시의 사찰은 광대하여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이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절 부근에는 큰 마을이 형성 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고 한다. 원종대사가 869년에 태어나서 958년에 90세에 입적하였다. 성주사의 무염대사(801~888)처럼 오랫동안 불가에 있었으니 고승의 위치에 있었고, 제자들도 많았을 것이라고 하겠다. 넓게 자리잡은 고달사지 초원에 들어서니 말 구유를 닮은 석조가 길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요즘의 욕조보다 크기가 제법 크다. 이곳에 쌀을 씻는다면 주변의 냇가엔 쌀뜨물로 하얗게 한참이나 흘러갈 것 같다. 당시의 가람의 규..

제7편 ; 외로운 섬(獨島)(울릉4)

1, 들어가며 올해엔 동쪽과 서쪽의 끄트머리 땅을 다녀오겠다고 봄부터 작정을 하였었는데, 바닷길 사정으로 한두 번씩 연기하다가 결국 인천 연안부두까지 올라가 한나절 동안 대기하다가 배가 뜨질않아 백령도길은 무산이 되었다. 다행히 울릉도길은 한 번의 지연만으로 열려 울릉도까지 도착하였지만, 독도행 선편의 출항은 전날까지도 미정이었다. 그 다음날 오전에서야 선편운행이 확정되어 독도행 페리호에 몸을 싣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맑은 날이면 울릉도에서 87.4km(운행시간 1시간20분) 떨어진 독도가 보인다고 하는데, 울릉도가 육지와의 최단거리가 죽변에서 130.3km이니 육지보다는 가까운 거리이다. 그래도 항구를 벗어나자 한참 동안이나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독도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제6편 ; 관해정(觀海亭) (울릉3)

1, 들어가며 울릉도에는 울릉 통구미 향나무 자생지를 포함한 천연기념물 8곳과 나리분지 투막집 등 민속문화재 5곳 그리고 울릉 남서고분군을 포함한 2곳의 기념물 등 15곳의 천연기념물과 문화재가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짧은 일정에 모두를 관람하고 보고 싶었지만 울릉도의 천혜비경을 눈에 담다보니 뜻대로 되질 않는다. 저동항에 들러 관해정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버스정류장 옆에 새워진 안내판을 들여다보니 울릉도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오듯 그려진다. 울릉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싯점은 지석묘 등의 유적으로 기원전부터 살아온 것으로 추정한다. 문헌의 기록으로는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정벌이 있으며,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왜적들의 침탈로 섬주민들의 피해가 속출하자 조정에서는 섬을 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