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23편 ;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 (홍성 1)

푸른나귀 2023. 5. 6. 16:39

1. 들어가며

 

 오랜 봄가뭄에 농심이 타들어가던 중에 촉촉히 적셔주는 봄비가 반갑기 그지없다.

 잠시 호미를 내려놓은 기회에 백야 김좌진 생가터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보령 청소에 위치한 김좌진 장군의 묘소는 보령시 지자체에서 추모하는 제향을 비롯하여 지나치는 길에 수시로 방문을 하였지만, 생가터는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으니 흠모의 정이 제대로 미치지 못한 것 같다.(보령의 흔적따라 제163편; 백야 김좌진장군 추모제 참조) 

 장군은 1889년 안동김씨로 아버지 김형규와 어머니 한산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904년 해주오씨와 결혼을 하였다. 1905년 가노해방과 토지, 재산을 분배를 시행하였으며 1907년 호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계몽적인 활동을 하였다. 1916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기반으로 항일무장독립투쟁에 전념하고 1920년 청산리 대첩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에 대한 가장 큰 타격을 주었고,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함양하기도 하였다. 1930년 1월 고려공산당 박상실에 의해 순국을 당하여 1934년 오숙근여사에 의해 유해가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 되었다가 청소면 재정리로 이장하였다. 

 장군의 집안은 원래 홍주 갈산지역의 부호였지만, 집안 노비들을 평민으로 돌려주고 재산을 나누워 주었으며, 독립운동자금으로 모두 소진하는 바람에 유해를 제대로 안치하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청소면 재정리는 어머니 한산이씨의 친정쪽 선산으로 나중에 그곳을 유택으로 자리 잡았다고 전해진다.

 

 장군의 생가터에는 김좌진 장군의 활동을 기록하고 유물을 보관한 백야기념관이 우측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좌측으로 복원조성한 생가터, 뒷편으로 백야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지내는 백야사라는 사당이 좌측 뒷편으로 위치하고 있다. 홍성군 지자체에서는 홍성의 인물 중 한 분로 김좌진장군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10월 25일 지역 유지들과 유가족들이 모여 백야사에서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2. 참고자료

 

   @ 위치 ;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 546번길 12

   @ 지정 ; 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 (1989년 12월 29일)

 

    @ 김좌진 장군 생가지(金佐鎭 將軍 生家址) ; 대한제국 말기의 독립운동가였던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장군은 1889년(고종26) 김형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총명하였다. 1907년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였다.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민족의 자주독립에 앞장섰다. 1925년 김혁과 함께 신민부(新民部)를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1929년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주석에 올랐다. 1930년 1월 공산당 청년당원에게 암살 당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대대로 살아온 이곳에 1991년 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본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현장 안내판 발췌)

  @ 김좌진 장군 사당(金佐鎭 將軍 祠堂) ; 이 사당은 구국의 이념으로 혼신을 다하여 순국하신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자 1997년 부터 건립 사업을 추진해 오다가 생가에서 약 300m 떨어진 이곳에 세우게 되었다. 장군은 홍성 갈산면 행산리에서 1889년 음력 11월 24일에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일을 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장군은 17세에 가노(장군의 집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 주었으며, 80칸이나 되는 집을 학교 교사로 내어주고 장군 자신은 현재의 생가지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장군의 집터는 지금까지도 갈산 고등학교의 부지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1907년에 호명학교(湖明學校)라는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으로 구국 계몽운동을 실시하였고, 1920년에는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히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전승을 거두었으나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가 쏜 흉탄에 맞아 41세에 순국하였다. 이곳 사당에서는 매년 장군의 독립운동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추모대제를 지내고 있다. (현장 안내판 발췌)

 

 

   @ 1992년 복원한 김좌진 장군 생가터 

   @ 생가터 안채 전경

   @ 생가터 측면 사랑채와 뒷마당 전경

    @ 생가터 안방

   @ 백야 기념관 전경

   @ 백야 김좌진 장군의 영정을 모신 백야사

    @ 백야사 전경

   @ 백야 김좌진 장군의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