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77편 ; 관암(冠巖)

푸른나귀 2020. 1. 2. 11:45

 

1. 들어가며

 

 대천해수욕장의 남쪽 해변 끝 부분의 송림이 우거진 숲 앞 해변에는 큰 바위군이 몰려있다.

 이곳은 예전에는 군사지역이라고 출입을 통제하기도 하였었고, 대체로 해수욕장을 이용하는 피서객들마저 잘 찾지 않는 지역으로서 바위들과 높은 파도로 인하여 위험이 상존하는 구간이었다.

 대천해수욕장에서 남포방조제에 이르는 구간이 바닷쪽으로 불쑥 튀어 나간 곶의 형태로 이곳을 예로부터 관암(冠巖)이라 하였다. 관암은 갓바위라고도 불리었는데, 고려 말 김성우장군이 왜구를 혁파하고 갓을 벗어놓았었던 바위라 하여 지명 이름으로 굳어졌다 한다.

 어떤 바위가 관암으로 명명 되었었는지 궁금도 하여 발길을 옮겨 보았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 바닷가는 한산하고 낙시꾼 두어명이 바다를 향해 낙싯대를 던지고 있다.

 군부대 철망 울타리를 끼고 바위군락으로 들어서자 파도가 바위를 치면서 하얀 포말을 쏟아낸다.

 습기먹은 바위를 조심조심 넘어가며 갓바위라고 명명 되었을만 한 바위를 찾아보았는데, 파도에 거무스레 물기먹은 바위 하나와 벼랑 끝에 마치 갓처럼 매달려 있는 바위를 찾아 볼 수 있었다.

 김성우장군이 적을 물리친 다음 갓을 벗어 놓고 칼을 씻었다고 하면 전자의 바위가 맞을 것이고, 왜적들이 멀리 왜선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김성우장군의 갓이라고 놀랐다는 이야기로는 후자가 맞을 것 같다.

 대체적으로 이곳의 바위군락을 통털어서 관암(冠巖)이라 불리는 것이 600여년의 세월 흐름 속에 지형적인 변화를 가져 왔을 터이니 굳이 어느 특정 바위를 이름 하여야 한다는 것이 무의미 하기도 할 것 같다.

 김성우장군 관암사적비가 대천해수욕장 머드전시관 앞에 서 있는데, 이곳을 방문하는 여름철 피서객들에게 얼마나 제대로 된 이야기를 이 비가 전해줄 지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관암(冠巖)의 원래 지명은 '갓배'로 '갓바위'와 같은 이름이다. 

'바위'를 바닷가 사람들은 '배'라고 불렀었다. 바닷가나 섬에서는 바위를 줄여 바우 또는 배라고 부르던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관암이 있는 곳을 '까페'라고 부르는데, 아마 미군부대가 상존하던 시절 부대내에 까페가 있어서 그 이름이 전해졌다고 추측들을 하고 있으나, '갓배'와 '까페'의 음이 비슷하여 붙여진 것으로 전혀 원지명과는 다른 오기이다. '관암'보다도 순수 우리말 지명인 '갓배'로 불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이 된다.

 

 

2. 관암(冠巖)에 서린 이야기

 

       * 위치 ;  보령시 신흑동 산 800-1

 

 1) 관암(冠巖)

 '갓바위'라고 불리는 관암은 현재의 보령시 대천해수욕장 해금강에 위치한 바위군이다. 김성우가 이곳에 출몰한 왜구를 섬멸할 당시 바위 위에 갓을 벗어 놓았다는 사실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다.

 관암은 외견상 소나무 숲으로 보이지만 급경사 절개지와 험한 바위군으로 형성되어 엄폐와 은폐가 용이하다. 현재 공군 대공포 사격장이 위치하고 있다.

 관암이라는 지명이 김성우의 토왜에서 유래하며 이곳의 풍경이 충청수영 내의 영보정보다 더 장관을 이루고 있다고 『신안읍지』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 관암은 현의 남쪽으로 사십 리에 위치한다. 고려 말 김성우 장군이 왜구를 섬멸할 당시 쓰고 있던 모자(갓)를 벗어 올려 놓았다는 데서 관암이란 명칭이 유래한다. 기암괴석이 우뚝 솟아있는 이곳은 해변 십리가 모래사장이고 만리 해역이 펼쳐진 멋진 풍경은 오천 충청수영이 있는 영보정과 비할 바가 아니다.'

 또한 시인 묵객들이 김성우의 관암을 주제로 한 시를 남기고 있다는데 희암 채팽윤(希庵 蔡彭胤,1669~1731)과 규남 하백원(圭南 河百源, 1781~1844)이 대표적이다. 다음 시는 채팽윤이 13세에 관암을 노래한 시이다.

 ' 푸른 바위가 큰 바닷가에 볼록하게 서 있는데 / 그 우뚝한 모습은 높은 관암에 옛 장군님의 모습과도 같다네./ 이끼 낀 물가에 끝 없이 비치는 달빛이 아름다운데 / 지금도 그 빛이 남아 있어서 낚시하는 노인이 나누어 즐기네. /'

 위 시에서 옛 장군님은 김성우를 가리키며, 관암의 모습이 김성우의 기개를 닮았다고 어린 채평윤은 읊고 있다. 따라서 관암이라는 지명이 김성우로부터 유래하여 전승되고 있음이 확인 된다.(김성우 평전, 김영모, 궁미디어, 250~252쪽 참조)

 

 2)김성우장군 관암 사적비(金成宇將軍 冠巖 史跡碑)

  김성우 장군은 고려 말 충신으로 왕명을 받들어 전라우도 도만호 양호초토사에 임명되어 왜구를 토벌 섬멸한 대장군이다. 장군의 업적은 여러 사료를 통해 증명 되는바 1412년 (태종13년)에 보령현지의 원본인 신안읍지와 선조40년에 당시 충청절도사였던 이흥로가 건립한 장군의 묘비와 1613년(광해군5년)에 당시 대제학이였던 월사 이정구선생이 지은 광성부원군신도비 등에 명확히 기록되어져 현재까지 역사적인 사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장군은 여러가지 군사적인 불리한 조건을 훌륭히 극복하고 뛰어난 지략과 용병술로 수 많은 왜구를 섬멸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승리한 전투를 예로 들면 군입리 전투, 월전리 전투, 의평리 전투 등이다. 특히 이 세차례의 전투는 유명한 세계전사와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만큼 전사상 위대한 대첩으로 이 전투의 실상을 분석해 볼 때 김성우 장군의 저 기 전술은 첨단무기로 싸우는 현대전에서도 중요한 용병술로 적용되는 바 장군의 탁월한 전투 감각에 군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서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전첩사지로 보면 적의 시체가 뒤덮였던 갯벌은 거먹개요, 매복한 군사로 적을 기습하니 이름하여 복병이요, 시체가 개미떼 처럼 쌓였다하여 의평이라,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였던 포구를 무창포라 부르는 등 이러한 지명들은 당시 김성우장군의 전투기록들이 사실이었음을 증명 해주고 있으며, 이 밖에도 상주막, 해망산, 군입리, 옥마산, 은선동 등 살아 숨쉬는 역사의 현장이다.

 오늘 이 기념비가 건립되는 바로 이곳도 당시 장군께서 전투에서 승리한 뒤 투구를 바위 위에 벗어 놓고 전쟁에서 찌든 먼지를 씻으며 다음 전투를 구상하였다하여 갓바위라 부르는 곳으로 장군은 이곳 천수만으로 침입하는 적을 감시하는 중요한 요쇄지로 선정 하였으며, 이는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 군이 병력을 상주시키며 작전의 중요한 전초기지로 삼고 있고 또한 군사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목욕시키고 휴식시켰던 저 백사장은 현재 도서 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으로 각광 받고 있으니 우리는 당시 장군의 탁월한 통찰력을 감격하며 장군의 뒤를 이어 이지역의 안보를 책임지는 군 지휘관으로서 만약에 적이 이지역을 침범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험에 처할 때에는 우리 민관군이 굳게 뭉쳐 불퇴전의 굳은 각오로 한치의 땅도 적에게 허락하지 않을 것을 굳게 다짐하며 윤원석 추모위원장의 줄기찬 총괄적 추진과 박상돈 대천시장의 투철한 민족사관 발취적 성원이며 시군 각급 유관단체와 관내지역 유림유지 일동의 동참으로 김성우장군 관암사적비 건립에 관할부대장으로서 추모회 일원으로 위와 같이 삼가 서술함이여.

       충성부대장육군대령 김병운 지음,  후손 김영희 씀.( 김성우장군 관암 사적부비(金成宇將軍 冠巖 史跡副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