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수부리 영수암 경내의 비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귀부와 이수만이 발굴되고 비문이 적혀있는 몸체는 아직 발굴되지 못한 상태로 현재는 비문이 없는 오석을 대체하여 비몸를 세우고 보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역적 위치로는 이곳이 웅천천을 따라 깊숙히 성주사지로 가는 길목에 있어 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에까지 커다란 가람이 있었을 것이고, 그곳을 거처로 삼고 불도를 정진하던 큰 스님이 입적하신 후에 부도탑과 함께 비가 함께 서워졌을 진대 아쉽게도 가람이 사라지고 탑과 부도 또한 땅속에 뭍히어 겨우 귀부와 이수, 그리고 부도의 상부만이 햇빛을 보게 되니 아쉽다.
비의 몸체 부분의 비문은 그 시대의 실정을 알아 볼 수 있는 역사서나 마찬가지이다. 성주의 낭혜화상비가 국보급으로 대우를 받는 이유중의 가장 큰 이유가 몸체에 새겨진 낭혜화상의 행적으로 신라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양태를 적나라하게 알게 해주는 역사서와 같은 금석문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거북모양의 귀부는 지금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두 귀와 뿔을 세우고 부라린 듯 무섭게 뜬 눈으로 포효를 내뿜을 것 같다. 등껍질에 새겨진 육각 무늬와 이수분의 용은 마치 살아 움직일 듯 꿈틀거린다.
받침 부분의 연꽃무늬 홈 부분과 상부의 머릿돌 홈의 크기로 보아서는 비몸의 두께가 임시로 끼워 둔 비각의 두께를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여 왠지 비로서는 불균형적인 크기와 너비, 그리고 높이를 가진 것 같이 느껴지는데 비의 몸체가 발견이 되어 제대로 수습이 된다면 많은 역사적 사실과 균형의 미를 찾을 것 같다.
요행히도 이 골짜기에 뭍혀 있을 비의 몸체를 찾는다면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상승할 것으로 보여진다.
2. 보령 수부리 귀부 및 이수
* 지정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32호
* 위치 ; 보령시 웅천읍 만수로 582-11 (수부리 산16-6)
영수암(예전의 단원사) 경내에 서 있는 비로, 근처의 절터에 있던 것을 수습하여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는 비몸을 잃어버린 채, 머릿돌만이 놓여 있다. 거북 받침은 머리가 용 모양이며, 귀와 뿔을 새기고, 턱 밑의 수염은 목에까지 조각하였다. 등에는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겼고, 중앙에 마련된 비몸을 꽂아두던 홈 주변에는 연꽃을 둘러 장식하였다. 머릿돌은 용과 구름무늬로 가득 차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액자 모양의 공간을 두어 다시 十자 모양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글씨는 적혀 있지 않다. 화려하고 세련된 조각 양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신라(新羅)때 범일국사(凡日國師)가 창건(創建)하였다고 전(傳)하는 단원사(團圓寺) 경내(境內)에 보존(保存)하고 있다. 임진란시(壬辰亂時) 사찰(寺刹)은 불타고, 고려시대(高麗時代) 양식(樣式)으로 화려(華麗)하고 세련된 비(卑)의 좌대(座臺) 귀부(龜趺)와 상륜부(上輪部) 이수(이首)만 주변(周邊)에서 수습(收拾) 되었고 비신(碑身)은 없으나 사찰경내(寺刹境內)에 문화재(文化財)로 지정(指定) 보존(保存)하고 있다. (보령 홈페이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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