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글

향가 (처용가)의 맛을 되새기며...

푸른나귀 2007. 6. 24. 18:42


         셔블 발긔 다래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 드리 노니다가                   밤이 깊도록 놀고 지내다가
         드러아 자리 보곤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라리 네희어라                    다리가 넷 이로구나!!!
         둘흔 내해엇고                       둘은 내(아내)것 이지마는
         둘흔 뉘해언고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대 내해다마란                    본디 내(아내)것이었지마는
         아아날 엇디 하릿고                빼앗긴것을 어찌하리...



         향가는 신라시대에서 부터 고려초기까지 한자를 차용하여 부른 노래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해석되어지고,자칭 국보급 박사라는 양주동
         박사(동국대 국문학)에 의하여 완전하게 그시대의 뜻이 전달되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도합 25수만이 후세로 남기어져 고대의
         언어연구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의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신라시대 경주로 갈수있다면 과연 그들과
         통역없이 대화가 가능할것인가???
         아마 우리가 외국에 나가 발짓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듯 하여야 할것이다.



         처용가는 동해용왕의 아들이 경주에 들어와 높은 벼슬을 하며 어여쁜 색시를
         얻어 살던 처용이 어느날 밤에 집에 돌아와  역신과 교접을 하는 색시를 보고
         이 노래를 부르며 돌아 서는데 이불속의 역신이 그 노래를 들으면서 '다시는
         처용의 그림자가 보이는곳이면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하였다.
         역신이란 마마(천연두)를 말하며 그후 처용의 부적을 문설주마다 붙이었다 한다.



         경주 박물관에 가보면 유리공예품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 시대 유리공예품은 대부분 서역과의 교역에 의하여 신라까지 들어온것이다.
         숯으로 밥과 온방을 할 정도로 국제도시가 되었던 경주에는 코 크고, 키가 큰
         서역인들도 많이들 왔었으리라.
         한반도에는 없었던 질병인 천연두(마마)도 그들과 함께 이땅으로 들어왔을 것이고
         키크고 코가크니 신라의 여인들은 그것도 클것이라 생각하고 서역인들과
         한번 놀아보고 싶은 욕망이 앞섰을 것이며, 혹간은 처용의 처처럼 남편에게
         들키여 국제적인 불륜으로 회자 되었을것이다.



         인간이 사는 모습은 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먼 미래에도 변할수 없는것이 있다.
         단지 마음속에 품으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행하면서도 숨기며, 자신을 감출뿐이다.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하려면 한눈을 지긋이 감고 여인의 발가벗은 모습을
         그려보면 이해할수 있단다.
         그러고 보면 천년을 훌쩍 뛰어 넘은 신라인의 살아가던 모습을 엿 볼수있다...



         깊어가는 가을밤...
         향가 한수를 귀뚜라미 소리에 얹어 보았다...
         다음번엔 고려요중에 골라 보겠네...


                                                2006.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