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 자료모음

《성호선생사설》과 울릉도

푸른나귀 2022. 5. 24. 20:07

1. 《성호선생사설》 천지문(天地門) 3 「울릉도」

 

   안용복이라는 자는 동래부의 전선(戰船) 노군(櫓軍, 노 젓는 일을 하는 군사)인데, 왜관에 출입해 왜말을 잘했다. 우리 숙종 19년(1693)인 계유년 여름에 울릉도에 표류를 했는데, 일본 배 7척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때 얼마후 왜인들이 섬을 다투는 논쟁을 일으키자 안용복이 왜인과 더불어 논쟁하며 따졌고, 왜인들이 노하여 잡아가지고 돌아가서 오랑도(五浪島)에 가두었다. 안용복이 그 오랑도주에게 "울릉(鬱陵), 우산(芋山)은 본래 조선에 속했습니다. 조선은 가깝고 왜는 먼데 어떤 이유로 나를 가두어 잡아두고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도주가 그를 백기주(伯耆州)로 보냈다. 백기도주가 빈례(賓禮)로써 대우하며 은을 주었지만 번번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백기도주가 "당신은 어떻게 하고자 합니까?" 라고 물었다. 안용복이 또 그 연고를 말하며 이르기를 " 침범해 어지럽게 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교린 관계를 두텁게 하기 위해서이고,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백기도주가 그것을 허락해 강호(江戶, 에도막부)에 보고했고, 문서를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드디어 돌아가게 되었다. 돌아올 때 장기도(長碕島, 나가사키)에 이르렀는데, 장기도주가 마도와 작당해 그 문서를 뺏고, 그를 마도에 보냈다. 마도주가 그를 가두고 강호에 보고했더니, 강호가 다시 외교문서를 만들어 두 섬을 침범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또 호위해 보내도록 명했다. 마도주가 다시 그 문서를 뺏고 50일 동안 가두었다가 동래 왜관으로 보냈고, 또 40일 동안 억류했다가 그를 동래부로 보냈다. 안용복은 그런 사실을 동래부사에게 다 고했지만,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범월(犯越)의 죄로써 그에게 2년의 형벌을 내렸다.

 

   을해년(1695) 여름 안용복이 울분을 삭이지 못해 떠돌이 중 5명과 뱃사공 4명을 꾀어 울릉도에 다시 갔는데, 우리나라 상선(商船) 세 척이 먼저 정박하며 고기를 잡고 대나무를 베고 있었다. 마침 울릉도에 온 왜선이 있었는데, 안용복이 여러 사람에게 포박해 잡으라고 했지만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따르지 않았다. 왜인이 이르기를 "우리들은 송도(松島)에서 고기를 잡다 우연히 이곳에 왔으니 곧 가겠다."하니, 안용복이 말하기를 "송도는 본래 우리나라 우산도(芋山島)이다."라고 했다. 다음 날 우산도로 쫒아가니 왜인은 돛을 올려 달아났고, 안용복이 그들을 추격해 옥기도(玉岐島)에 표류했다가 다시 백기주(伯耆州)에 이르렀다. 백기도주가 환영하니 안용복이 울릉수포장(鬱陵搜捕將)이라 자칭하며 가마를 타고 들어가 도주와 더불어 대등한 예로 대하며 전후의 사정을 매우 자세히 말하였다.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반드시 쌀 1석에 15말, 면포 1필에 35척, 종이 1권에 20장을 보내는데, 마도(馬島, 대마도)가 훔처 줄이고 쌀 1석은 7말, 포 1필은 20척, 종이를 잘라 3권으로 만들었다고 이릅니다. 내가 직접 관백에게 가서 속인 죄를 다스리려 합니다."라고 했다. 동행 중에 문자를 잘하는 자가 있어 소장을 만들어 도주에게 보여주었다. 마도주(馬島主)의 아버지가 그것을 듣고 백기주에서 용서를 구하였고, 이 일이 드디어 해결되었다. 위로해 돌려 보내며 말하기를 "땅을 다투던 일은 모두 당신의 말과 같이 하겠습니다. 이 약속과 같이 하지 않는 자는 마땅히 중벌에 처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가을 팔월에 양양에 돌아와 정박하니 방백(方伯, 관찰사)이 장계를 올려 보고하고, 안용복 등을 한양으로 압송했다.(우산도는 왜 독도인가, 이기봉, 소수출판사, 2007, 151~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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