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 자료모음

백운거사 이규보

푸른나귀 2022. 3. 18. 12:33

1. 농민의 눈물을 시에 담아낸 이규보

 

   망년회 회원들은 불우한 가운데에서도 한 시대를 진작 시키는 문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는 의식은 부족했다. 또 중국의 고사와 문체를 따르기에 열중하여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비평을 듣는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한 문인은 이들보다 훨씬 길게 활동한 이규보이다. 이규보의 아버지 이윤수는 여주의 토착세력인데 개경으로 와서 낮은 벼슬을 종사하였다. 이규보는 개경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릴적 이야기를 쓸 때 개경을 배경으로 하였다.

 이규보는 20세 이전에 과거를 세 번 보았으나 번번히 낙방하였다. 한미한 집안 탓도 있겠지만 그의 말대로 술을 퍼 마시며 방탕하게 생활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20세 초반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좋은 자리를 주지 않아 사직하였으며, 이무렵 망년회 비공식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망년회 회원들이 그를 정식 회원으로 끌어들이려 했을 때 마침 오세재가 죽었다.

 이담지가 이규보에게 물었다. "그대가 사양한 벼슬을 망년회 사람으로 보충할 수 있을까?"

 이규보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칠현들이 어찌 조정의 빈자리를 채우겠는가? 완적(阮籍)이 죽은 뒤 그 자리를 이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중국의 죽림칠현으로 벼슬을 하다가 죽은 완적의 고사를 빌려 대답한 것이다. 이 말에 좌중은 한바탕 웃고 말았다. 시를 지으라고 하자 이규보는 이렇게 읊었다.

 〈알지 못하겠구려, 일곱 현인 속에 /  누가 씨앗에 구멍을 뚫을 사람인지를〉

 중국의 죽림칠현 중에 어느 인색한 사람이 자기 집의 좋은 오얏씨를 가져다가 심을까 염려하여 씨앗마다 구멍을 뚫었다는 이야기를 빗댄 것이다. 칠현들이 겉으로는 청담을 벌이면서 세상일에 초연한 듯 가장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명리와 벼슬을 탐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좌중 사람들은 이 시를 듣고 화를 냈다. 그러나 이규보가 지적한 허위의식은 뒷날 사실로 드러난다.

 이규보는 천마산에 들어가 술로 세월을 보내며 백운거사(白雲居士)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세상을 등지겠다는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최충헌이 한번은 문사들을 초대하였다. 이 자리에 이규보가 끼어 글을 지었다. 이규보는 최충헌의 눈에 들어 벼슬을 얻었다. 그는 현실정치 또는 관계에 뛰어들었으나 권력을 휘두르거나 빌붙으려는 뜻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왕성한 참여의식의 발로였다. 뒷날 그는 최씨의 대몽항쟁을 찬양하였으나 최씨들의 횡포를 감싸지는 않았다.

 이규보는 그 시대에 우뚝 솟은 시인이었다. 불교의 보조국사와 함께 쌍벽을 이룬 시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인로가 한유와 소식을 모방하는 것을 보고 "나는 고인의 말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다. 새로운 뜻을 창출해낸다" 고 하였다. 그는 고인의 글을 읽어 이를 육화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평가를 보자.

 

 배우는 자는 경사와 백가의 글을 읽고 뜻을 얻고 도를 전하는 데 그칠 뿐만 아니라 그 말을 익히고 체를 본받아서 마음에 담고 다듬는 데 열중해야만 시를 지을 때 마음과 입이 서로 호응하여 말을 내면 문장이 된다. 그래서 난삽한 말이 없고 고인을 답습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새로운 경구를 낸다. 그는 경사와 백가를 두루 읽어 푹 젖어들었기 때문에 시어가 자연히 풍부 하였다. 비록 새로운 뜻이 지극히 미묘해서 표현하기 어려운 곳이라도 그 말을 곡진하면서 정밀하게 익었다. (최자의 『보한집』)

 

 그의 시를 이런 관점에서 감상해 볼 만하다. 그가 남긴 수천 수의 시에 몇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물론 그 역시 전통적인 서정시를 많이 지었고, 음풍농월의 주제를 자주 사용하였는데 무당, 기생, 승려, 천민 또는 술, 풍속 따위로 소재의 범위를 넓혔다. 농민봉기와 외국 침략을 소재로 한 시도 있다.

 이규보는 어느 날 전이지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마구 퍼 마셨다. 술에 취하자 시흥이 일어 구구절절 읊으며 전이지에게 벽에 써 놓으라고 일렀다.

 

 일찍이 동서남북의 떠돌이 신세, / 술 취해 오니 눈꽃이 우물 바닥에 떨어지네.

 백운거사는 본디 미친놈으로 / 십 년의 인간살이 부질없는 방랑

 술 취해 노래 부르는데 누가 꾸짖으랴 / 일생에 뜻을 내놓아 자적하누나.

 저물어 긴 칼 짚고 청천에 의지하여 / 공명과 부귀는 따지지 않노라.

 

 술을 빙자하여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였는데, 술은 그의 일생을 통해 한시도 떠날 날이 없었다. 이런 주정뱅이가 한번 붓을 들면 날카로운 통찰력이 번득인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버려진 아이를 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호랑이가 포악하다지만 새끼에게는 상처를 내지 않는다.

 어느 계집년이 아이를 길에 버렸느냐.

 금년에는 곡식이 조금 여물어 굶을 지경은 아닌데

 응당 새로 시집가서 지아비를 아첨하려는 게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여 있다. 그는 인도주의자였다. 그는 늦게 벼슬을 받긴 하였는데 문사로서는 도통 걸맞지 않는 변산의 작목사(斫木使)가 되었다. 변산의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 배 만드는 일을 감독하는 직책이었다. 하루는 변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부를 거쳐 금구에서 유숙을 하게 되었다.

 

 새벽에 고부 고을을 떠나 / 밤늦어 금구 고을 들어왔네.

 탐악한 구실아치는 도망치는 쥐요 / 어리석은 백성 어쩔 줄 모르는 원숭이라.

 

 이 시구를 금구 관아의 벽에 써놓았다. 현령과 구실아치들의 반응이 어찌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다. 그는 일부러 관아의 벽에 써놓고 모두에게 보도록 하였던 것이었다. 몽골의 침략이 있은 뒤 강화도로 피낭 하였을 때 다음 시를 지었다.

 

 쇠락한 집 종 모진 매를 맞는데 / 불쌍하여 풀어준다 해도 떠날 줄 모르는구나.

 너의 주인이 보잘것 없어 가라는데도 / 어찌 내 자비를 덕 보려 않느냐

 

 종을 버려진 아이처럼 불쌍하게 여겨 종문서를 태워 버리고 풀어 주었다. 그는 농민의 대변자였다. 농민을 불쌍하게 여겼으며, 그들의 고통을 단순하게 읊은 수준이 아니라 농민들의 편에 서서 참상을 고발하고 벼슬아치와 위정자를 매도하였다.

 농민의 항변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농부를 대신해서 읊는 시」(代農夫吟)를 읽어보자.

 

 씨 뿌릴 때 둔덕에서 호미질 하는데 / 모습이 추하고 검어 사람꼴이 아니로다.

 새 곡식 푸르러 아직 밭에 있는데도 / 고을 구실아치들 이미 조세를 걷었구나.

 힘써 농사지어 나라 넉넉하게 함은 우리들 일 / 어찌 몹시도 피부를 긁어나느냐.

 

 이 정도의 분개는 얌전하다. 그는 나라에서 농민들에게 청주를 빚거나 쌀밥을 먹지 말라는 금령을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하는 시를 지었다. 이 시는 38구의 장편시인데 그 중 몇 구절을 읽어보자.

 

 장안의 권세가들은 / 보배를 언덕처럼 쌓놓고 / 빵은 쌀 영롱하기 구슬 같은데 / 말과 개에게도 먹이는구나.

 넉넉하게 많은 곡식 거두어도 / 한낱 관가의 것이 되오. / 모조리 빼앗겨도 어쩌지 못하고 / 한 알도 내 것 못되오.

 백옥같이 찬란한 밥 / 맑고 맑은 녹파주(綠波酒) / 이것 너희 힘으로 나온 것이냐 / 하늘도 그 죄를 물으리.

 

 농민들은 풀뿌리를 캐 먹다가 굶주려 쓰러지는데도 권세가들은 술과 밥과 고기를 썩인다고 분노했다. 농민의 절박한 사정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는 사실성을 살린 사회시 또는 농민시를 쓴 선구자였다. 이 전통은 뒷날 김시습(金時習)과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졌다.

 이규보는 여러 장르의 문장을 남겼는데 그 중에 기(記), 설(說), 전(傳)이 돋보인다. 「슬견설」(蝨犬設)에는, 누가 개를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광경이 애처롭다고 하자 이를 화로에 던져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애처롭다고 하면서, 아파하는 마음은 크고 작은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설파 하였다.

 「국선생전」은 「국순전」과 같이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술이 저지른 행위를 늘어 놓았다. 다만 「국순전」이 현실 부정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하였다면 「국선생전」은 술이 민간에 공헌한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규보는 최씨정권에 아첨하여 벼슬살이를 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부에 들지도 않았으며, 축재를 하는 일 없이 평생을 근색하게 지냈다. 그는 최씨정권의 몽골항쟁을 높이 평가하였다. 농민봉기 현장에 기록을 맡은 관리로 따라갔으나 온건한 견해를 보였다. 농민의 편에 섰으며 외침에 철저하게 항쟁할 것을 주장하였고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규보는 망년회 회원과 여러모로 방향과 성격을 달리하였다. 그는 몽골의 침입을 겪었으나 원의 지배를 받던 시대에는 살지 않았다. 원의 지배 아래 있던 후배들에게 그의 의식과 행동은 많은 영향을 미쳤다.

 ( 한국사 이야기 6편, 이이화, 한길사, 2015, 224~23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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