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 자료모음

시월 초하루의 상념(이고 선생)...

푸른나귀 2015. 11. 12. 20:09


 

 

 


 음력 시월 초하루의 늦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고교시절 부터 매년 집안 어르신을 따라 서울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수원에 도착하여 또 한참이나

 기다려야 오는 시내버스를 타고 경기대 앞에서 내려 광교 저수지길을 걸어 이곳을 찾아 왔었다.

 (시조비는 수원시가 확장되는 바람에 조원동에서 이곳으로 수해전 옮겨짐.)

  젊은 시절 직장에 얾매어 한동안 이곳을 찾지 못하였지만, 집안 어르신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이곳을 다녀 오시는 것을 연중 행사로 치셨다.

  그러고 보니 매년 양지의 선산시제(팔일)에는 참석을 했지만, 광교터널 옆의 능선이 따라 조성되어 있는

  선조들의 고향에 찾아온지 벌써 십여년이 훌쩍 넘어 선 것 같다.

  아버님을 뫼시고 승용차로 이곳을 찾는길에 이제는 혼자서는 다닐수 없을거라고 중얼거리듯 말씀을

  하신다.

  하기사 그전엔 집안 어르신들 여럿이서 함께 다니셨기에 서로 말벗이 되고 먼길도 마다하지 않았을텐데

  이젠 함께 하시던 그 분들은 모두 멀리 가셨으니 이때쯤이면 외로움이 더 하실 것이다.

  내 나이 육십이 되었는데도 시향에 가보면 아직도 애들 축에 끼인다.

  젊은이들이 함께 하지 못하는 시제에 대한 어르신들의 우려에도 생업이라는 팍팍한 이유로 면죄부 삼아

  나 또한 그렇게 살아 왔었기에 이젠 어르신들을 대신하여 선조들의 고향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영동고속도로의 광교터널 옆을 일년에 몇번씩 드나들지만 선조들이 누워있는 능선이를 흘깃 눈길 한번

  주고 지나치기만 하는 후손을 보고 손사래나 치실려나???

                   

  음력 시월 초하루...

  수원 팔달산의 주인장 이 고 할아버지의 묘소엔 솔고루가 햇빛에 비치어 반짝인다...



 1) 참고자료


   (1) 어제는 왕씨를 섬기다 오늘은 이씨를 섬기다니요.

        이숭인은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 정도전과 재명이 비슷한 라이벌 관계였다. 공민왕이 그와 정도전을 총애하였으나 조선이 건국할 무렵에는 반원파로 돌아서서 유배 되었다. 그 뒤 정도전은 그를 자기 정치노선 쪽으로 포섭하려 하였으나 스승의 길만을 좇아 여러 차례 유배되었다. 정몽주가 살해된 뒤 그 일파로 몰려 호남 순천 땅으로 유배되었다. 새 왕조가 들어서자 정도전은 곧바로 심복 황거정을 보내 나주에 있던 이숭인을 죽이라고 하였다. 황거정은 곤장 수백 대를 때린 뒤 이숭인의 몸을 묶은 채 말 위에 얹어 수 백리를 달리게 했다. 도은(陶隱) 이숭인은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불리며 고려의 충신으로 추앙을 받았다.

 이고(李皐)는 한림학사로 명망이 높았으나 이성계 일파의 득세에 염증을 느껴 조정을 떠나 수원 남탑산(南塔山)에서 살았다. 공양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사자를 보내 "무슨 즐거움으로 사느냐?"고 묻자 자기가 사는 곳의 산천 경치를 찬양하면서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막힌 데가 없다"고 회답하였다.

 그는 '세상을 잊고 산다'는 뜻으로 호를 망천(忘川)이라 하고 죽을 때 까지 수원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성계가 즉위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고 경기안렴사의 벼슬을 주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태조는 화공을 시켜 그가 거쳐하는 곳을 그리게 하고 그림 제목을 '팔달산'이라 하였다.(한국사 이야기9, 이이화, 한길사, 2015,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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