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해 후 (邂 逅)

푸른나귀 2016. 7. 4. 18:50

 

해 후 (邂 逅)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40여년 만에 고향의 해변 횟집에서 행한 동창모임에 재원이가 처음으로 나왔다. 동창들 사이에 그는 반골적인 생각과 언어로 동무들 사이에 기피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젠 뱃살도 두둑하게 나왔고, 머리카락도 빠진 만큼이나 희끗희끗한 중년을 지나 초로의 노인 소리를 낼모레면 듣게 될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인천의 남동공단에서 조그만 공장을 운영한다고 했다. 자식들도 곧 여윌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한 순배의 술잔이 돌고 농담 반 진담 반의 소리로 누가 재원에게 말을 건넨다.


 뽀얗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으로 상주가 제공한 흰 고무신을 신고, 수건으로 머리끈을 동여매고 요령소리에 발을 맞추어 상여꾼들이 힘겹게 신작로 길을 걸어간다. 뒤를 따르는 어린 상주는 포플러 나무에 붙어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귀찮은지, 논바닥에 출렁이는 푸른 물결이 눈을 어지럽히는지, 제 어미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교 앞을 지나갈 때 시멘트 블록과 스레이트로 지은 새 건물에서 공부를 하는 동무들이 창문으로 쳐다볼 것이 부끄러워 걸음이 무거워진다. 공연히 미루나무 이파리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찡그리게 하자 신작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걷어차니 검정고무신으로 짜르르한 전율이 심술처럼 전해진다.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재원이 조부께서는 워낙이 그 동네의 구두쇠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근검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온종일 농사일로 논밭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그 덕에 농토를 더욱 넓히게 되었고, 알곡이 먹고도 남을 정도로 재산이 늘었다고 한다. 춘궁기에는 동네 사람들에게 장리쌀을 빌려주고 가을철 알곡을 수확하면 돌려받기도 하였다. 그 양반은 미운 사람에게는 말질을 할 때 밀대로 말위의 쌀을 싹 밀어서 주기도 하고, 성실하고 인정 있는 동네 사람에게는 말위에 한 줌의 쌀을 더 얹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동네에서는 그 집안 형편이 그래도 좀 나은 편이라 해방 후 혼란의 힘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조부는 자신보다 나은 삶을 바라고, 자식은 펜대를 잡는 직장을 가질 수 있도록 아들을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까지 보내줬다. 그러나 아들은 어찌 된 일인지 사회로 나가 제 밥벌이는커녕 주색잡기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꼴에 그의 조부께서 아들을 집에 붙잡아다 놓고 장가를 보내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그때엔 모두가 먹고살기 힘든 때여서 부양 식구를 하나라도 줄이는 것이 궁촌에서의 삶이었기에 쉽게 며느리를 맞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며느리가 아들을 하나 두고서는 이른 나이에 꽃가마를 타고 자작골 선산으로 떠나가 버리자 다시 새로 며느리를 얻으니 재원의 새어머니가 된다. 완고하고 무섭던 조부에게서나 세상살이에 무심하던 아비의 틈에서 바람막이가 되었던 어미가 없어지고 새 어미의 보살핌은 기대하기 더욱 어려워져 홀로 선 자신의 모습에 방황을 하며 초등학교를 마치기도 전 가족들과 동무들에게도 알리지도 않고 서울행 장항선에 몸을 실었다.


 “정남아! 큰일 났다. 지금 청계천에 전경들이 길에 쫙 깔려 들어갈 수도 없어. 피복노조의 노조원들이 사람을 모으고 데모를 하는 바람에 온 세상이 난리판이여. 물건을 청계천 시장에 갖다 줘야 할 터인데 큰일이네.”양복점 주인의 말에 정남이는 자신이 다녀오겠노라 말하고 보자기에 주섬주섬 물건을 쌓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명동에서 청계천까지는 줄잡아 걸어서도 30분이면 다다를 수 있는 거리이다. 한참 공사 중인 서울에서 가장 높게 건설된다고 하는 삼일빌딩이 먼발치에 보이자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청계천 삼일고가도로에 다가서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매캐함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정남이는 종로통을 골목 사이로 이동하여 겨우 거래처에 도착했지만 공장안은 어수선하고, 공장 주인만이 혼자 남아 이것저것을 정리하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언제까지 재봉을 맞춰줄 수 있을지 장담을 못하겠다고 전해주게. 애들이 전태일인가 뭔가 하는 놈의 말에 들떠서 다들 일을 팽개치고 있으니 원!”공장 주인은 주섬주섬 맡긴 보따리를 풀면서 말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우르르 몰려가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양복점 주인의 심부름을 하면서 기술을 배운다는 신념으로 이제껏 무보수로 일을 하며 점포 뒤편 작업대에 자리를 펴고 숙식하며 고생스럽게 사는 것은 열심히 일을 해야 만이 그것이 부모를 위하고,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며, 데모대들을 향해 더욱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고 성공할 텐데 왜 저렇게 경거망동한 짓들을 하는지 의아심이 들었다.

 정남이 또한 읍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을 보아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지만, 빈궁한 살림과 밑으로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의 생계에까지 걱정하는 부모들에게 차마 학비마련을 떼쓰지 못해 읍내 버스정류장 부근 양복점에서 잔심부름을 해주며 집안의 입을 하나라도 덜어주는 것이 자신의 집안에 도움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마음과는 달리 단정한 교복에 교모를 눌러쓰고 자기가 일하는 양복점 앞으로 지나가는 친구들을 바라볼 때에는 자기모습의 초라함을 보이기 싫어 피하게 되고, 빨리 기술을 배워 큰 도외지로 나갈 것을 다짐하였는데 때마침 고향의 어른 한분이 명동에서 양복점을 차려놓고 심부름꾼이 필요하다는 소식에 두말없이 이곳으로 달려 와 몇 해를 보냈던 것이다.


  무작정 상경한 재원이는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휘황한 불빛과 화려한 도시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면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제로 지금까지 고향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광경에 정신을 쏙 빠트려 역에서 내려 어디로 걸어갔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걸어가다 길옆 가판대에 내어놓은 둥글고 풍성한 빵에 눈이 멈추었다. 그것은 조그만 반죽을 부풀려 구워낸 속이 텅 빈 공갈빵이었지만 재원은 그것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맛있을 것 같아 목구멍으로 침을 넘기며 바라보고 있었다. 몇 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허름한 옷차림의 건장한 청년 둘이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서울역에서부터 계속 재원이를 따라왔었다. 그들 중의 한명이 재원에게 다가와 배고프냐면서 빵을 사주겠다며 가게 안으로 주춤거리는 재원이를 떼밀 듯 데리고 들어갔다. 하얀 접시에 단팥빵이며 소보루빵, 거기에 공갈빵까지 한 접시를 주문하고 그들과 테이블에 같이 앉았다. “보아하니 어디 갈 곳도 마땅하지 않은 모양인데 정해진 자리는 있는가?”약간 나이가 덜 먹은듯한 청년이 물었다. 배고픔에 접시에 놓여있는 단팥빵을 하나 집어 입으로 넣으니 입안에 단맛이 가득 들어오고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너같이 무작정 상경한 애들은 잘못하면 쓰리꾼이나 양아치들에게 잡혀가 앞잡이 노릇으로 생고생 할 수 있어.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나쁜 형들이 아니니까 함께 우리 일하는 곳으로 가자. 배는 곯지 않을 수 있으니까.”배고픔에 입안으로 빵을 집어넣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서도 서울 가면 눈 뜨고도 코 베어 간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온지라 출입문 쪽을 바라보며 어떻게 도망을 갈까 궁리를 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출입문 쪽으로 그들이 앉아 있고, 등치도 자기보다 좋기 때문에 밀치고 나가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이들에게 붙잡혀 가면 껌팔이나 소매치기의 앵벌이노릇으로 신세를 망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어떻게 하든 빠져나갈 궁리를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였다. 때마침 출입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아주머니가 들어서기에 후다닥 아주머니를 밀치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한참을 인파사이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다가 어느 골목에 들어서서 연탄재가 쌓여있는 쓰레기통 뒤에서 한숨을 고르고 주의를 관망하였다. 그들이 포기하고 지나갔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주섬주섬 일어나 골목을 나오려 할 때, 목덜미를 쥐어짜는 듯한 손아귀 힘이 느껴지며 몸통이 연탄재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들이 나와바리인 이곳에서 그들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재원에게 알려주려는 양 골목 끝으로 끌고 들어가 흠씬 두들겨 팼다.

  다음날, 그들과 함께 고개를 넘고 한참을 걸어 간곳이 나중에 이태원임을 알았다. 그들은 도로 옆 판자때기로 만든 조그마한 구두닦이 점포 앞에 발길을 멈추고 점포안의 얼굴과 손에 시커멓게 묻어서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는 자를 불러내더니 무어라 자기들끼리 숙덕거리고 있었다. 조금 떨어져 머뭇거리고 있던 재원이를 불러 그들은이 사장님은 좋은 분이시니 이곳에서 일하면서 구두 닦는 일을 잘 배우면 돈 많이 벌수 있을 것이야. 허튼짓 하면 어디든 널 찾는 건 쉬운 죽 먹기이니, 말 잘 듣고 열심히 일해.”하곤 사라졌다.

 

  그날부터 재원은 구둣방 사장의 식솔이 되었고, 그보다 먼저 구둣방의 식솔노릇을 하는 전라도 남원 쪽에서 올라온 윤칠이라는 아이와 함께 구두를 찍어오는 일을 하게 된다. 재원이보다 두세 살 더 먹은듯한 윤칠이는 자그만 키에 날렵하기도 해 그 동네에서는 손재간과 수완이 좋다고 소문이 났고, 그 보다 등치가 더 큰 애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뚝심까지 가지고 있었다. 윤칠이는 고향에 두고 온 동생을 돌보듯 재원이를 보호하며, 어떻게 하면 신사숙녀들의 구두를 쉽게 벗겨 올 수 있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이태원의 뒷골목을 휘잡고 위세를 떨치는 주먹패들에게서도 울타리가 되어 어린 재원이를 보호해 주었다. 매일 그들과 어울려 사무실이며 점포를 누비면서 손님들의 구두를 찍어 구둣방에 나르는 일을 어린 몸으로 종일토록 일하고 나면 구둣방 주인은 찍어온 구두의 수량에 의해 얼마간의 푼돈을 건네주고 그 돈으로 둘은 고단한 서울의 뒷골목 생활을 하게 된다.

  적은 돈으로 끼니를 때우기에도 버거워 허름한 방한 칸 구하지 못하였기에 남의 집 추녀 밑에 자리를 펴고 지친 몸을 눕혀야만 하였다. 그래도, 이렇게 외진 객지에 어린 몸으로 와서 더 험악한 꼴을 당하지 않고 구두닦이 패를 만나 배를 곯지 않음도 큰 행운이라 여기고 날이 밝으면 구둣방에 나가 구두를 찍어오는 일에 열심히 하게 된다. 주변 미군부대에서 나이트클럽에 놀러온 양키들에게까지 손짓발짓으로 구두를 찍어오는 수완을 발휘 하였다. 그런 재원이를 윤칠이는 형으로서 더욱 믿어 주었다. 구둣방 사장도 그들을 신임하게 되고 구두를 닦는 기법과 수선하는 방법을 전수하여 수입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으나 몇 해를 이태원 길거리에서 지내며 추위와 구두약으로 온몸이 더러워져도 잘 곳, 쉴 곳이 마땅치 않고 모여진 돈도 없음을 인식하게 되어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을 찾게 된다.

 

  다행히도 윤칠이의 동향 선배의 소개로 청계천 어느 한 미싱 공장에서 사환으로 먹여주면서 기술을 배우는 조건으로 사람을 구한다는 말에 재원은 그곳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청계천의 피복노조가 전태일의 분신자살로 극도의 어지럽던 상황이 정부의 강력한 공권력 행사로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게 잦아든 것처럼 시장의 유통경제는 예전처럼 활기차게 돌아가는 듯하였다. 하지만 몇 개 안 되는 60촉 전구 불빛에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작업장에는 라디오의 유행가 가락만이 왕왕거리며 돌아가는 미싱 소리에 대부분 농촌에서 올라온 여공들과 몇몇 일을 거드는 사내애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운동권의 주동자들은 대부분 잡혀 가거나 그들 속에 숨어서 의식화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능공들은 업주의 적은 임금인상 등의 회유책으로 그들의 가정 살림에 보태고자 열심히들 일을 하였다. 재원이 또한 야간 중고등 과정을 밟으면서 못 다한 공부에도 관심을 갖고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숙소로 가던 중, 선임 재단사에게서 술이나 한잔하자는 말에 광장시장 골목 막걸리 집에 도착해 보니 몇몇이서 먼저와 빈대떡에 막걸리를 먹고 있었다. 주춤거리며 앉는 재원이를 재단사는 함께 일하는 친구라며 소개를 시켜주었다. 그들 중 턱수염이 쭈뼛하게 난 한 사람이 막걸리 잔을 들이키며 자본가는 불균등한 분배로 부를 더욱 차지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헐값에 자본가에게 넘겨주어 더욱 핍박한 삶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할 때 나오는 잉여가치는 노동자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노동쟁의를 일으켜 노동자의 권리를 찾아야 된다.”며 재원이는 통 알 수 없는 말로 열변을 토하는데 어느 대목은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이 있기도 하였다. 숙소에 돌아와 창문으로 보이는 몇 개의 별을 쳐다보며 이태원에서 남의 집 추녀 밑에서 이슬을 피해 잠을 청하던 시절을 생각해 보며 뜬눈으로 지새웠다.

 

  김포공항에서 시청으로 달리는 오픈카에는 000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양복 부분 금메달을 따온 정남이를 비롯하여 수상자들의 목에 커다란 화환이 걸쳐 있고, 공항대로변에는 태극기를 흔들며 국위선양을 하고 온 기능공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동원된 시민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선진조국을 표방하고 기술입국이란 국책에 의해 모든 부분에서 경제발전이 우선이라고 하는 정부의 지원 아래 선반, 밀링, 자동차, 미용, 전자, 금속 등 전국 어디서나 기능공이 되고자 하는 우수인력들이 이 분야에 몰려들어 실제 공업입국이 되는 듯도 하였다. 정남이의 노량진 허름한 집에서는 이틀간에 걸쳐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획득 잔치가 이웃 친지까지 모여 진행되었다. 모두들 이제는 정남이가 출세를 했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청와대를 방문하여 대통령과 조찬회를 같이하고 훈장까지 수여를 받았으니, 양복 계통에서는 이제 국내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기술력도 인정받게 되자, 이제는 명동 양복점에서 독립을 하려 하였으나 자금사정이 형편없어 주저하게 된다. 그래도 그의 집안에서는 정남이의 출세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일치되어 어머니가 장항선 완행열차를 타고 대천에서 노량진까지 수산물을 양은다라에 한가득 담아 노점상으로 조금씩 저축해 둔 돈과 주위 노점상들과 계를 형성해 계주 노릇까지 해가며 겨우 돈을 준비해 명동 주변에 작은 양복점을 차리게 된다. 처음에는 부족한 자금 탓으로 사업이 어려웠으나 차츰 올림픽 수상자라는 명예에 기술력도 인정받아 사업은 점차적으로 나아지게 되었고 몇 년 후에는 청계천에 하청업체를 둘 정도로 양복업계에서는 인정받을 정도로 사업은 지속적으로 번창해 나갔다.

 

  70년대부터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도시빈민과 직장인, 노동자들의 선교와 교양 교육, 구호활동을 하던 도시선교회라는 단체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유신정권의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선진국에 들어설 때까지는 개인의 자유를 일부 제한할 수도 있고, 국가의 산업자본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대기업들에게 국가적으로 모든 편의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는 경제정책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을 누구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도시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증대되던 시기였다. 더구나 이농으로 도심지로 몰려든 도시빈민층에 해당되는 노동자들은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형편이 나아질 줄 모르고, 일하다가 산재를 당해도 제대로 된 치료는 고사하고 쫓겨 나가다시피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에서는 인간 최소한의 기본권마저도 묵살되는 산업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자멸감은 모든 자본가들에 대한 원망으로 눈빛이 달라졌다. 이들에게는 도시선교회의 활동은 한 가닥 희망의 빛으로 다가옴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다니는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는 양복을 재봉하는 일이 주로 일감으로 들어왔다. 서울시내의 많은 양복점에서 재단을 해 오면 수십 명의 여공들이 미싱을 돌려가며 꿰매고, 실올을 뜯어내며 하루 종일 먼지를 먹으면서 일하기 때문에 미싱에 손을 다치고, 물건들을 나르다가 발을 다치고, 심지어는 젊은 나이에 폐병에 걸리기까지도 하였다. 조금 다친 것은 누구에게도 말을 못 하고 몸이 피곤하여 하루를 쉬려해도 공장장이나 업주에게 싫은 소리 들을까 봐, 그만두라고 할까 봐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질 못하였다.


  피복노조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사람들 중에는 대학을 다니다가 운동권으로 나선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빈농의 자식으로 서울유학 온 젊은이들로 그들 부모들이 빈농의 나락에서 헤어 나오질 못 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온 좌절의식 속에 칼 막스의 이론대로 제대로 된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주의 변혁만이 노동자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부모들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며 변혁을 추구하였다.

그런 믿음으로 그들은 청계천과 구로공단 등 산업전선에 위장취업을 하여 많은 기능공들에게 노동자의 권익을 찾기 위한 의식화 교육과 강력한 투쟁만이 그들의 길이라 생각하고 노동자들에게 의식화를 암암리 진행을 하였다.

  그중에는 재원이도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며 느낀 감정들이 그들의 생각에 점점 귀 기울이게 된다. 땀에 의한 노동력이 제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가까워 오리라는 희망이 그들과 함께 하면서 신념이 되어 다져지게 된다.

 유신정권이 끝나갈 무렵 재원이는 구로동의 한 공장 굴뚝에 올라갔다. 금속노조와 피복노조를 포함한 연합노조 세 명이 근로기준법 수호 투쟁임금인상 투쟁을 기치로 삼고 기습적으로 공장 굴뚝에 오른 것이다. 준비해온 플래카드를 굴뚝에서 내려걸고 그들이 밤새 손에 잉크를 묻히며 등사기로 밀어낸 전단지를 바람에 뿌리면서, 굴뚝 밑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치하는 전경들을 향해 구호를 외쳐댔다.

 굴뚝 밑으로 구로공단의 가발공장에서 일하는 고향친구 미숙이와 문래동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경미의 새하얀 얼굴이 보이는 듯도 하였다

 멀리 한강 너머로 용산의 삼각지가 보이고 그 너머로 청계천이 보이는 듯하다. 거뭇한 삼일빌딩이 서울의 하늘을 떠받치는 듯, 시멘트로 묻혀버린 청계천을 보호하는 듯 아스라이 보인다.

 

 “호박에 퍼랜 줄 긋는다고 속 까정 뻘건 수박 되는 건 아녀~”

재원이 야릇한 눈웃음 지으며 화답을 한다.

그럼, 겉 뻘건 꽃호박이 자른다구 속 까정 뻘건건 아니지~”

술판이 끝나고 몇몇 사내놈들이 어스름한 해변으로 뭔지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휘청휘청 걸어간다. 어둠속에서도 파도의 흰 포말이 소리 내며 밀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지나가며 모래사장에 찍어 놓았던 삐뚤빼뚤한 발자국들이 소리 없이 파도에 쓸려 내려간다. ()